●──── 구약강론/여호수아

16.여호수아 16:1-17:18 요셉 자손의 땅

불편한 진리 2014. 9. 5. 19:21

여호수아 16:1-17:18

요셉 자손의 땅


16:1에 의하면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곁 요단 곧 여리고 물 동편 광야에서부터 나아가 여리고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산지를 지나 벧엘에 이르고라고 했고, 4절에서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16,17장은 요셉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른 지파는 모두 한 지파당 하나의 몫이지만 요셉 자손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으로 나누어서 두 몫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의 자손이 남보다 많은 두 몫을 받게 된 것은 두 배의 축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무엇을 통로로 해서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요셉 자손을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적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요셉 자손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켜서 무엇인가 보이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요셉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48:22에 의하면 내가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고 야곱이 요셉을 향해 축복하고 있다. 요셉의 자손이 두 몫을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야곱의 축복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쉽게 이 문제를 야곱이 이렇게 축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야곱이 축복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서 일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요셉에게 담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형제를 구원하도록 요셉으로 하여금 희생을 하도록 하셨고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언약적 희생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었다.

요셉의 희생은 시편 105:17-19에서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요셉이 희생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고난 가운데서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복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야곱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과 왼손을 어긋나게 해서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요셉이 손이 바뀌었다고 하니 야곱은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48:19)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는 하나님의 희생을 아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야곱은 일생동안 자신이 태에 있을 때에 리브가에게 주셨던 이 계시를 알아가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제 야곱은 그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입장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칙을 알았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의 자리에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이러한 사실들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 자손에게 두 몫의 땅을 주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셉 자손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요셉 자손들은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요셉 자손들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이렇게 불평하고 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17:14)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이 되었으니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 자손의 요구에는 불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땅이 좁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 아니었다.

17:16에 보면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이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즉 이들의 불평은 기업으로 받은 땅이 좋은 땅이 아니었다는 데서 나온 불평임을 알 수 있다. 산지와 골짜기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요셉 자손들이 받은 땅은 곡식을 가꾸기가 좋은 평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을 해야 하는 삼림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 자손은 이것이 싫었던 것 같다. 더구나 그 땅에는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과도 싸워서 물리쳐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에 요셉 자손은 자기들이 받은 땅이 작다는 불평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에 많은 큰 민족이 되었다는 빌미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아 누리고 있다면 아니 그 생명 안에서 살고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생이란 그 아들 독생자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당장 내게 세상에서 큰소리치고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만한 요소가 없다는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한다.

예수를 통해 질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나, 교회에 나오는 것을 통해 인간적인 심성을 착하게 가지고 세상을 살자는 것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았으니 교회에서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심보나, 교회 봉사를 통해서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은 하늘나라에 땅을 확보하기 위한 투기 내지는 보험을 들어놓는 차원에서 예수를 이용할 뿐이지 그분을 위해 전폭적으로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상태로 사는 모습이어야 한다.

요셉 자손의 요구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거절한다. 17:15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한다. 17:18에도 보면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말한다.

여호수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요셉이 힘이 있기 때문에 능히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셉 자손에게 이러한 땅을 주신 이유는 요셉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들을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즉 편안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을 준 것이 아니라 산지와 또한 가나안 족속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땅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요셉 자손이 가나안 족속에게 다시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도 인간은 무엇을 주어도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를 볼 줄 모르고 불만족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그 약속대로 일하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늘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는 구절들이 16:10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는 말씀과 17:12,13에서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들이다(참고 15:63).

인간이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도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지 않지만 결국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극적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에 열 두 제자들은 하나 같이 다 도망하였다. 아니 인간이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 홀로 속죄를 이루는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