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9.여호수아 21:1-45 레위인의 성읍

불편한 진리 2014. 9. 5. 19:30

여호수아 21:1-45

레위인의 성읍


약속의 땅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땅을 분배할 때에 계속 언급되었던 것은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13:14,33, 14:4, 18:17). 기업을 준 것은 없을지라도 그들이 거할 성읍은 있어야 할 것이다. 14:4에서도 보면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이라고 했다. 즉 그들이 거할 성읍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을 어디에 어떻게 주느냐 하는 것이 본 장의 내용이다.

1,2절을 보면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사 우리의 거할 성읍들과 우리의 가축 먹일 그 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었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땅을 분배하고 나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우리가 거할 성읍과 가축 먹일 들을 주라고 하셨었다는 말을 한다.

민수기 35:2-8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가 얻은 기업 중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줘서 레위인들이 거하도록 하고 그 성읍 사면의 들을 줘서 그들의 가축이 거할 곳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레위 지파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을 요구를 하는 것이다.

레위 자손의 요구에 의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 지파에게 성을 내주게 되는데 그 성의 수가 모두 48성읍입니다. 아론 자손이 13성읍, 그핫 자손이 10성읍, 게르손 자손이 13성읍, 므라리 자손이 12성읍, 모두 합해서 48성읍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성읍들은 기업을 받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서 분배받은 것이다. 유다 지파 8성읍, 베냐민 지파 4성읍, 시므온 지파 1성읍, 에브라임 지파 4성읍, 단 지파 4성읍, 요단 서편의 므낫세 반 지파 2성읍,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지파 2성읍, 잇사갈 지파 4성읍, 아셀 지파 4성읍, 납달리 지파 3성읍, 스불론 지파 4성읍, 르우벤 지파 4성읍, 갓 지파 4성읍, 이렇게 해서 도합 48성읍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분배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레위인들이 받은 성읍과 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기업에서 다시 분배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것에서 레위인의 몫으로 떼어 낸 것이다. 레위인을 위해서 자신들의 소유를 나눈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레위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수기 3:12,13을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장자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일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신 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자기희생을 통해 살려낸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레위인의 선택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이 대속하여 장자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전체에 흩으시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고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레위인은 기업이 없는 자가 되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기업이 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결국 레위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이다. 이스라엘이 나눠주지 않으면 그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약자이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약자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레위인이 그들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증거 되기 때문이다.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흩어 버리는 것이다. 헌금 역시 자신의 소유를 흩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눠줘야 할 자를 있게 하신다는 것은, 소유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은 자신의 소득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땀이 들어간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남을 도와준다고 해도 자기만족과 보람이 되는 곳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남 주기도 아까운 것이 바로 내 소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세상 속에 레위인을 흩어 놓으신다. 그리고 레위인을 도구로 삼아서 과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도피성은 심판과 은혜를 담고 있는 성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참된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다. 이 도피성 다음에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이 주어지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심판과 은혜에서 나온 용서의 정신으로 존재한다면 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약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의 기업을 얻었고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자유를 얻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증거는 자신들의 소유를 통해서 드러나야 했던 것이다. 즉 애당초 아무런 소유가 없던 자가 소유가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는 소득이 있을 것이다. 소득이 주어질 때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소득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단지 십일조를 바침으로서 증명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십일조가 진정한 십일조인지를 물으시기 위해서 그들 속에 약자를 흩어 놓으시는 것이다. 레위인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흩어 놓으시고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진심으로 자신의 소득에 대해 흩어버리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를 증거 하시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레위인이 거할 성읍을 분배하라고 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는지는 레위인을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이다.

창세기 49:7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이다. 어찌되었든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중에 흩어져 살게 된 말씀이 성취되었다.

43-4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대로 성취되어진 그 상태가 바로 안식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외쳤던 당시의 상황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하라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레위인을 이스라엘이 돌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주어지지 않은 모습이라고 지적하신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함으로 희생 제사가 유지되고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안식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십일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