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20.여호수아 22:1-34 돌아간 지파의 증거단

불편한 진리 2014. 9. 5. 19:32

여호수아 22:1-34

돌아간 지파의 증거단


본문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기업을 분배하고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에게 48성읍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땅 분배가 모두 끝이 난 후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지파를 불러서 옛날에 모세가 너희들에게 주었던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요단강 동편의 땅이 가축을 기르기에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자신들은 요단을 건너지 않고 여기 거하겠다고 요청을 한다(32:1-5). 이 요청에 대해서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32:6)라는 말로 책망을 한다.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싸워서 얻어야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만 추구한다는 책망이었다.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나안을 정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다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울 것을 원했다. 비록 승리는 여호와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을 편안히 앉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주시는지 그것을 이스라엘이 공동체로 함께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 정신이 이스라엘 전체 퍼지고 그 정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요단 동편 땅 때문에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안함과 풍요로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을 책망을 한 것이었다. 그러한 르우벤과 갓 자손들의 행동은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32:7).

모세의 책망에 대해서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기 가족들이 거할 성읍을 건축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을 얻기까지 같이 싸우겠다고 말한다(32:16-19). 이로 인해서 요단 동편에 거하겠다고 요청했던 자손들은 다른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과의 싸움에 참여를 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가나안의 싸움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민수기 32:19에 보면 우리는 요단 동편에 산업을 얻었으니까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즉 주어질 기업이 전혀 없는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단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오랜 세월 동안 싸움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2,3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보면 여호수아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대가도 없는 싸움에 오랫동안 성실히 참여한 것에 대해서 모세와 내 말에 청종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형제를 위해 싸움에 참여한 것을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킨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호와의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책임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생략한 채 단지 인간관계로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명령에 대한 책임이 그들로 하여금 대가없는 싸움에 성실히 참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형제라는 관계 안에는 단지 인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말씀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은 형제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제 그들을 요단 동편 땅으로 돌려보낸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5-6). 자기 소유지에 돌아가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행하라고 한다. 과연 그들이 자기 소유지에서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호수아는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모든 길을 행하는 것으로,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단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단 동편에 거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땅에 제단을 세울 수가 없었다. 10절에 보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로 그들과 싸움을 하려고까지 한 것을 통해서 볼 때에 이스라엘에 제단은 오직 지정한 한 곳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기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대가없는 싸움을 하고 희생을 했는데 단지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제단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아무 곳에서나 세울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단을 세울 수 없는 그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명령과 율법을 지키는 것인가?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말한바가 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로 집약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결국 요단 동편의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모든 것은 형제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켰던 것처럼 요단 동편에서도 그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보내면서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주면서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서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형제들과 나누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전리품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승리를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 전리품을 주면서 장막으로 돌아가서 형제들과 나누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승리의 기쁨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형제들과 같이 나누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형제라는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나눈다는 개념을 벗어나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 은혜는 형제들과 나누는 개념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했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이고 은총이다.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은혜 안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그들의 신앙은 항상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 이야기된다. 죄를 지었으면 이스라엘이 지은 것이지 이스라엘 안에 한 개인이 죄지은 것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이 잘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는다. 이처럼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언약 공동체 안에서 판단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신약에서 한 몸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은 곧 주님의 몸으로 표현된 교회를 말한다.

몸의 모습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우리들에게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을 위한 죽음으로 드러났다.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나라는 개인 안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이웃을 위한 삶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신앙이란 결코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신앙이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결코 성자로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붙들려 가는 삶임을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을 하면 뭔가 나하고는 거리가 멀고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다. 고난을 이웃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으로만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매 맞음과 핍박,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능력은 형제요 이웃의 짐을 대신 지게 하는 것에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