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4.여호수아 14:1-15 땅의 분배(2)

불편한 진리 2014. 9. 5. 18:29

여호수아 14:1-15

땅의 분배(2)


민수기 26:52-56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의 계수함을 입은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물론하고 그 기업을 제비뽑아 나눌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통해 하는 것은 인간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방법이나 자신의 욕심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배하시는 것도 하나님께 절대적인 주권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라고 했고, 또한 5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눔으로 이스라엘에게 기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땅을 분배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가 누구인가?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이 아래와 같으니라고 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엘르아살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안이다.

3,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 이제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이 종결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살면서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드러내는 일이다(물론 전쟁을 통해서도 그들이 가져야 하는 중심은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기업이 없음에 대하여 철저히 강조하시면서 제사장이 분배를 주관하도록 하심으로 앞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 전쟁을 통한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어린 양의 희생을 퍼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퍼뜨리되 땅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레위인들과 같이 땅이 없는 자의 입장으로 살아가면서 오직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레위 자손에게는 기업이 없는 이유를 요셉 자손이 두 지파(므낫세, 에브라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시는 것이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후손을 위해 레위 지파가 희생되는 차원이다. 이렇게 하여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에 흩어지지만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희생과 은총을 드러내며 사는 증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 보고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약의 백성이라는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이 이스라엘 안에서 계속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계속 복을 유지하는 것은 제사장, 레위인을 통해서이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제사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계속 기억되고 있는 한에서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것으로(15:6) 복이 되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안에 의는 오직 어린 양의 희생만 의가 되고 그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갈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제비뽑기를 하여 땅을 분배하는 상황에서 갈렙이 헤브론을 요구한 것이다. 아마 이 땅이 기름진 땅이요 모두가 욕심낼만한 땅이었다면 다른 지파들에 의해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산지이고 더군다나 아직 그 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하였다.

그렇다면 갈렙이 왜 굳이 이 땅을 요구하고 나섰는가?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가데스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9). 과거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에 10명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정복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때 두 사람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았다.

민수기 14:24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신명기 1:36에서도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는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그때 갈렙이 정탐한 땅은 헤브론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이 기업으로 얻을 땅을 확정받았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굳이 제비뽑기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생각한 대로 갈렙은 이제 이 땅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낙 자손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헤브론을 요구했다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약속의 땅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갈렙은 앞에서 살펴본 레위인들의 모습과 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

갈렙이 바라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었기에 자신의 연약함(갈렙은 이때 85세가 되었다)이나 혹은 그 땅이 산지라는 사실, 또는 아낙 자손들의 크고 견고한 성읍 등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고 헤브론 땅을 약속으로 자신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땅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외적인 조건이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나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실행된다는 사실에 있어서 장애물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갈렙과 같은 희생 정신, 즉 약속을 믿고 약속만을 바라보고 온전히 순종한 언약의 정신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게 되어 있다. 가나안 땅의 분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유다 지파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갈렙이 산지를 요구한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 언약 정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정신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이 기업이 아니라 그 땅에 살면서 레위인, 갈렙과 같은 존재를 통해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 사는 그것이 곧 약속의 땅 안에 사는 것임을 늘 기억하면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증거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다. 땅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약속의 땅으로 믿고 사느냐 하는 문제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백성이 된 자로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주님 안에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생명이신 그분 안에서 생명의 현상들이 우리들에게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주성교회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