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3.여호수아 13:1-33 땅의 분배(1)

불편한 진리 2014. 9. 5. 18:22

여호수아 13:1-33

땅의 분배(1)


본 장에서는 1-7절에서 남은 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8-33절에서는 요단 동편 땅의 분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요단 동편 땅을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를 하게 된다(32:1-5). 그들의 내심은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가서 함께 싸우는 것을 면하고 먼저 편하게 요단 동편에서 안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32:6,7). 이를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과 같은 반역이라고 규정하셨다(32: 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서 싸워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수고 와서 이 땅에서 거하라고 하시면서 그 땅을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셨던 것이다(32:33-42). 이런 점에서 이미 그들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스럽게 요단 동편 땅에 대하여 언급하시고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쟁을 끝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을 땅을 차지했다고 확정짓고 있다는 것은 온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수행했기 때문에 다시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는 뜻에서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한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요단 동편에 있다고 해서 따로 자기들만의 안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는 두 지파 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즉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퍼뜨리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5:18-21).

여호수아 12:7,8에 의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남방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10족속을 말씀하고 있는 것과 여호수아에서 6족속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차이는 없다. 창세기에서 열거된 10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모든 족속들을 남김없이 열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고자 하신 지역을 지리적으로 알려주시기 위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2:7,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6족속만 정복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출애굽기 3:8 이하에서는 주로 6족속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승리하게 하고, 여호수아를 통해 승리하게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차원에서 12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3장에서부터 기록하고 있는 땅의 분배에 대한 말씀은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하고 그것을 누가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묻는 차원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절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이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라고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2절 이하에서는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라고 남은 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제 여호수아도 늙어 더 이상 가나안 땅의 남은 곳을 정복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다. 남은 땅은 아직 많은 데 여호수아는 늙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후계자도 세워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6절에 보면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즉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어서 싸울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의 일도 결코 여호수아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역시 앞으로의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도 아니고 여호수아도 아니었다. 언약의 하나님이었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인간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이요 지도자로 여기고 섬기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의지할 만한 힘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학력이 나보다 높다든지 실력이 뛰어나다든지 아니면 재물이나 권력이 있다든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내게 없는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때에 상대방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를 의지하는 것은 내가 가지지 않은 하늘의 영생을 목사가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목사를 의지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만큼 오늘날 교회들은 목사들이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교회란 목사가 없어도 주님이 교회의 머리로써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유지되는 주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오직 머리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좇아 살아가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 레위인을 두셨던 것이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14)이라고 하셨고, 또한 32,33에서도 요단 동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단 동편 땅을 두 지파 반에게 확정지어 주시면서까지 레위인에 대하여 굳이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중심점은 레위인에게서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땅 없이 사는 레위인들이 어떻게 사는 가를 보라는 것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가지고 살면서 레위인들이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 사는 그것이 자신들의 본질적인 삶이라는 것을 늘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 레위인들의 삶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제사를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희생이다. 이스라엘이 남은 땅을 정복하는 것도 여호수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희생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언약의 땅에서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이스라엘인 교회는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생명으로 알고 사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