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4.요나 3:1-10 여호와의 말씀대로

불편한 진리 2014. 4. 9. 14:27

여호와의 말씀대로
요나 3:1-10
 


요나서 2:1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1:17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볼 때에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요나를 물고기가 삼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연히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을 때에 그 말씀이라는 의미는 결코 행위와 말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말은 해 놓고 행동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의 상황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3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또 7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선포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니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이 또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또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제 요나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요나에게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요나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가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본문의 기록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요나에게 사명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나를 훈련시키신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훈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자가 잘 듣도록 바뀔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으로 인간의 죄성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요나 한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이 대표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정관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이렇게 이끄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언약을 성취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고 계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죽이고 언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사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 과거의 이스라엘을 죽이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창조하여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나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포되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의도대로 드러나고 성취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니느웨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니느웨에서 말씀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심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선포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의논하여 절충된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 실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요나가 말씀에 굴복된 자로 바뀌어져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선지자가 죽고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선지자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은 니느웨에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니느웨에 선포되게 됩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라 삼 일 길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삼 일이 아니라 하루를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5-8절).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삼일 동안 다니면서 선포한 것도 아니고 하루 선포하니까 온 성읍에 소문이 퍼지고 그 소식이 왕에게까지 상정되어 왕도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고 강포를 행하는 일을 그치도록 합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니느웨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니느웨의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싶다고 해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마음대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하게 만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였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에게서 회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시키신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했다가 심판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서 1:1 이하에 보면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1-3a)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외치던 이 상황은 요나 선지자가 외쳤던 시대에서 약 100년 후의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심판을 유보하신 것은 결코 니느웨를 구원코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훔서를 통해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니느웨를 회개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나 선지자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하는 것을 보도록 요나를 참여시키신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는 배에서 다시스로 도망하면서도 배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로 다윗 이래로 가장 부유함을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유함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고 있기 때문에 누리는 복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니느웨에 선포하라고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요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그러한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은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그 고정관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죄가 많거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 구원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언약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짐에 있어서 요나 같은 자를 보내시는 것은 고통과 희생의 과정이 포함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하고 그 말씀대로 산다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이고 또한 모든 인간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게 하심에 있어서 요나를 고통과 희생의 자리로 끌고 가셔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은혜와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지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자격이 이스라엘에게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니느웨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전례없는 강성함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도 벌써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에 요나라는 존재가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었듯이 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오셔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39-41)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의 고통과 희생 그것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거부하고 도망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거나 내가 잘 믿을 것 같아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 모든 순종의 삶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시킴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고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우습게 압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나무 십자가 자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홀로 십자가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셨기 때문임을 믿는 자가 성도요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 쪽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구원에 대한 어떤 근거도 날마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근거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도,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어떤 당위성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7-31)(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