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3.요나 2:1-10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불편한 진리 2014. 4. 9. 14:25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요나 2:1-10
 


누구나 사람들은 고난이 오는 것에 대하여 어려워하고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것이 주어질까 하는 의아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기도 하고 심하면 좌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에게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고난들이 결코 무의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다 종결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고난, 어려움을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들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뒤늦게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은 늘 자기가 무엇을 이룬 줄 알고 자기가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면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복음 때문에 우리는 기분 나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물이 넘어지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깨달아지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하나님의 개입이 두藥?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는 죽으려고 하였으나 요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요나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죽어야 하겠기에 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를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은 준비하시고 계속해서 일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장에서 요나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기도하였다는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요나의 기도 속에서 요나가 어떤 것을 깨닫고 있고 하나님이 요나에게 어떤 것을 드러내시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이제야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요나는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오니까 비로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나의 모습이었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실로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하였던 그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은 언약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0-14).
이스라엘이 배부른 상태가 될 때에 하나님을 잊고 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풍족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죄성을 아셨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당대 없는 정치적 평강과 부를 누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만큼 해이해졌던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니까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어디 다른 구석이 있습니까? 우리는 편한 상태에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오면 그제서야 기도하게 되지요. 결국 하나님은 고난을 주셔서 나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애초부터 자기를 위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요나 자신의 낮아짐을 요나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에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의역을 하여 요나가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배삯을 주고 배에 ‘내려갔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5에서도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고 기록하여 요나가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어디까지 내려갔느냐 하는 것을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서 요나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요나를 얽어매어서 꼼짝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그게 어디까지입니까? 2절에 보니 “스올의 뱃속”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올이란 음부, 무덤, 지옥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즉 요나는 죽음을 경험함으로 더 이상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요나가 막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철저히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내신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자리로까지 몰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이쯤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회복시켜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도 계속 불평하면서 죽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다시 회복시켜서 사명을 주셨다면 더 이상 불평하지 않도록 하셔야 되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나가 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책망하시고 그 다음에 그를 통해서, 즉 요나를 바로 잡아서 요나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해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이렇게까지 죽음에 이르도록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셨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것인지를 요나가 오해하기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언약을 이루어 가는 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언약을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는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다운 모습, 제사장 나라로서의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요나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직무에 대한 태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요나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에 말씀이 선포되면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언약에 제한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에게 언약을 주셨고 히브리 민족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1:9). 그 하나님의 언약에 이방인이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멸망을 체험하게 됩니다. 1-3절은 바로 죄로 인한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경험이 멸망이요 죽음의 경험이라고 본다면 요나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은 요나가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요나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보시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요나의 기도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상태가 된다고 할지라도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7절에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기도가 성전에 도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가 성전에 도달되었다는 것은 성전이 갖는 범위가 공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깨달은 것은 성전이 단순히 예루살렘에만 있다고 여기지 않고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이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지만 이미 건짐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성전에서 지금 제사를 드리는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음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9절에서 요나가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린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고백을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는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든 나오지 않든 상관이 없다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풍랑이 있을 때에 요나는 죽으려고 하였지만 언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니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초월하여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평소에 알 수 없었던 여호와를 물 속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알게 된 것은 이스라엘마저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언약을 주시는 분에 의해서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들어 마태복음 12:38 이하에서 요나보다 더 큰 이가 바로 인자(예수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원이란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예수님 그분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바로 이렇게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밝혀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삶이어야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요나의 고집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란 죄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되셔야 했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희생되셔야 했다는 것은 누구도 어떤 인간도 인간이 희생되어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고발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나의 죄성을 고발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나오는 회개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