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3.나훔 2:1-13 이스라엘의 영광

불편한 진리 2014. 4. 9. 14:15

이스라엘의 영광
나훔 2:1-13
 


엊그제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테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강경한 보복조치를 하겠다고 미국은 공언하고 있고, 테러의 배후를 아프가니스탄에 망명해 있는 오사마 빈 라덴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강국인 미국의 심장부에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룡과 같은 미국의 움직임에 따라서 어떤 파장이 전해져 올지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성경적 입장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미국이 당한 테러 사건을 두고 창세기 11장을 빗대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말이 더욱 가까웠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이라도 주님이 재림하실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교인들은 이런 사건들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기에 준비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분명히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 성경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 세상에 일어난 일이 있으니까 그 일들을 가지고 성경에 유사한 말씀에다가 그것을 대입시켜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종말이라는 것도 우리가 세상에 어떤 일이 심각하게 일어나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님 오실 때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세상의 일이 계시가 되고 성경은 그 계시를 확증해 주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온전히 다 드러나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다 드러났기에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말의 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종말이 왔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주의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테러 사건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고 종말과 연관시켜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7,18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테러 사건은 특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범주 안에 있는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심 이후 다시 오실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종말론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가지고 종말과 연결시켜서 경각심을 가지거나 혹은 공포심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 상관없이 늘 말씀에 의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나훔서 1:15에 의하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이스라엘)에게는 아름다운 소식(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홀로 받으신 피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다시 예배를 시작하며,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희생 제사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없도록 철저히 멸망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훔서 2장은 바로 이러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다”고 말씀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니느웨를 침략하여서 멸망시킬 바벨론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니느웨와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심으로 대적들을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라고 나훔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허용하시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되어진 ‘지키며’, ‘파수하며’,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라는 말은 여호수아 1:6-9에 쓰여진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니느웨가 섬기고 있는 신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앗수르 왕국 너희 신들의 힘을 빌어 여호와를 대항할테면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대항할 힘이 되는가 하는 하나님의 물음인 것입니다. 반항할 힘이 있다면 힘껏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니느웨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다 행함으로 죄의 본성을 다 드러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고 어떻게 대항하고 있는가를 철저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죄악 된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어떤 요구를 하면서 떼를 쓸 때에는 보통의 부모들은 한참 동안 달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조그만 협박도 하지요. 그래도 안 되면 화를 내면서 최종적으로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네 마음대로 해!’라고 하는 말입니다. 자녀가 이 말을 듣고 진짜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인 줄로 알고 그대로 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부모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그 말을 하는 뉘앙스와 상황을 파악하여 진짜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말이 ‘네 마음대로 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느웨는 부모가 하는 최후 선언과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고 그 죄악이 우리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단한 것은 인간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수하에 부릴 수 있는 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니느웨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대적이 되어서 싸우시기 때문에 앗수르의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10절까지 말씀에서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3,4절). 피가 붉게 물드는 전쟁으로 니느웨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앗수르를 멸망하게 할 자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무섭고 빠른지 횃불 같고 번개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앗수르의 힘에 굴복하고 니느웨에 모여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도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나훔 선지자는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의 먹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과거에 앗수르는 사자처럼 포효하면서 많은 주위의 약소 국가들을 침략하였더랬습니다. 그러한 사자의 기상이 어디갔느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철두철미하게 니느웨를 진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외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할 수 있는 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고 우리의 능력으로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 힘을 많이 쌓아 놓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힘은 재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의 투자를 재물을 쌓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도 바빠서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 내서 교회에 와 주고, 아까운 물질 조금 헌금해 주었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 배후에는 당연히 보상 심리가 깔려있게 마련입니다. 시간 내서 예배 봐주었고, 헌금해 주었으니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된 심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을 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니느웨를 완전히 진멸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무너뜨린 앗수르를 가만히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뻐서 보호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잉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로 그가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출산될 때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며 대항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언약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니느웨가 아무리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야곱의 영광, 곧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2절).
여기 “야곱의 영광”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의 영광은 성전이었습니다(참고 학 2:9). 성전이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의 의미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죄인들과 교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언약의 피로 말씀하시면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이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 새 언약 백성 된 자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 야곱의 영광, 즉 이스라엘의 영광 때문에 친히 앗수르와 싸우신 것입니다. 니느웨는 자신들의 힘이 강력하였기에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언약적 사고방식은 오늘 우리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에 대한 문제도 나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죄의 습성입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를 얻게 될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 때문에 마치 외형상으로는 하나님이 마귀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비언약적 사고방식, 세상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철저히 우리의 대적이 되겠다고 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겠다고 나서는 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되고 맙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철저히 우리의 힘대로 무엇인가를 할테면 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의 의만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함으로 주님은 성도의 마음에 오직 십자가만 남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영광을 위해 일하시듯이 오늘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에 굴복되어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가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 사람을 이스라엘이요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20010912/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