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4.나훔 3:1-19 수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불편한 진리 2014. 4. 9. 14:18

수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나훔 3:1-19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 이후로부터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고자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 아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아래 있게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 앞에 뿐만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의 관계로 유지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밟고 눌러서 자신을 드러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 세계가 죄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하여 고안해 낸 것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표현하자면 무화과 잎으로 덮개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자 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학력의 수치, 무지의 수치, 가난함에 대한 수치 이런 것들을 가리기 위하여 온갖 것으로 치장하는데 많은 것들을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전부 이러한 치장을 위한 싸움입니다. 치장이 잘 될 때에 자존심이 세워지고 자신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치장이 잘 되지 않으면 자존심이 뭉개지고 자신을 잘 드러내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치장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지 그렇게 치장한다고 해서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치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의 모습이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장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인의 본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의 본능을 좇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의 본능을 좇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성령을 좇아 사는 존재입니다. 성도에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한 시도 살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의 본능을 좇아 사는 것은 곧 멸망입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한 이후 다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언약을 베푸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실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아담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내를 하와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하와라는 이름의 뜻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은 줄 알았는데 살 길이 열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인간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고안해 낸 무화과 잎으로는 수치를 완전히 가릴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리워 줄 때에만 제대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덮개로는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제공한 덮개로만 덮여질 때에 죄는 가리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대속’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속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서 보시지 않겠다는 의미와 또한 하나님 편에서 자신의 눈을 덮어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으시겠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대속의 은혜를 궁극적으로 이루시기 위하여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을 뿐이지 그들 자체가 언약의 핵심이나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원수의 나라를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는 차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선포하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 이스라엘(유다)은 왜 저들이 멸망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고 또한 왜 우리는 니느웨의 심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과 언약 밖에 있는 것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죄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반드시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니느웨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나훔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아직도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멸망시키되 니느웨의 수치를 드러내면서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창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절). 창녀라고 비유하는 이유는 앗수르인들이 밖으로 나가 주변 지역의 족속들을 많이 약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포로로 삼아 음행을 가르치고 마술로 유인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러한 니느웨의 수치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5-6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북쪽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포로가 되게 하시며 또 니느웨로 하여금 너무 심하게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욕했다고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과연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입니까? 아니 기왕 그렇게 하실 것이면 아예 애초부터 앗수르로 하여금 북쪽 이스라엘을 넘보지 않게 막으셨어야 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남쪽 유다도 이스라엘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남겨두시고 북쪽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 니느웨가 이스라엘을 능욕하였다고 니느웨의 수치를 드러내면서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고 있는 니느웨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가지고 공격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자체도 하나님의 진정한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없었기에 니느웨를 공격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이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는 의미를 드러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얻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실체를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는 수치가 온전히 드러나고 거기에 하나님의 대속이 나타날 때에 속죄의 은혜가 부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수치를 가져오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덮는 덮개로서는 죄를 가릴 수 있거나 죄를 온전히 덮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수치는 우리 모든 죄인들의 수치였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수치를 드러내시기 위하여서 주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수치를 당하신 것은 단지 지상의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으로 모으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시고 그 앗수르의 수치를 폭로하심으로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실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유다도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라고 하는 이방인들을 멸망시켜서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을 살리고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일을 벌이시고 나훔 선지자로 하여금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언약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십자가를 향해 가셨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것만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곧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우리의 수치가 폭로된 자리입니다. 내가 고난 받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인데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숱한 인간들의 반역과 이스라엘의 말씀에 대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참으며 일해 오셨던 것입니다.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언약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루신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그저 베푸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렇게 먼저 알지 못하면 주님으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혜를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비로소 받고 나니 우리는 말하기를 나도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나는 죄인이줄 알게 됩니다. 내가 바로 니느웨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인줄 알게 됩니다. 아니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를 멸망케 하셔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치와 모든 허물을 주님의 십자가로 덮으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작은 손바닥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우리의 부끄러움(죄)을 주님께서 당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회개하고 늘 감사하면서 주님을 위해 사는 성도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교회에 와서 떠벌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늘 죄인이 주님의 은혜를 한없이 입었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이런 관계를 가진 자가 참 이스라엘이요, 주님의 몸 된 교회이며 십자가 피의 은혜를 입은 성도입니다(20010926/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