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2.요나 1:11-17 나를 바다에 던지라

불편한 진리 2014. 4. 9. 14:23

나를 바다에 던지라
요나 1:11-17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우리가 아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에 오랫동안 일한 노하우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젊은 부교역자에게 하는 말이 목회를 해 봐야 된다고 합니다. 부역자, 전도사 생활 백날 해봤자 그것으로는 담임 목회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담임 목회자가 되어야 비로소 목회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고 쌓이는 만큼 노련한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 초보자를 은근히 무시하면서 젊은 목회자에게 한 수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또 젊은 목회자들은 수년 동안 쌓은 목회의 노하우를 전수 받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굽신거리면서 아부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오랫동안 목회하신 분들을 무조건 무시하자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목회 경험, 노하우에 우리가 목숨 걸고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정말 십자가의 주님을 무시하지 않고 십자가로 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모독하지 않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앞세우고 수단과 방법을 중요시할 때에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보다 경험을 앞세우는 일입니다. 실제 오늘날 교회는 교회 성장이 단연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를 예수님 보듯 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복음은 적당히 선포하는 것으로 교회라는 표시를 낼 뿐입니다. 이 모든 우리의 행위들이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이끄시고 말씀을 드러내시는 일에 우리의 프로그램이나 인간적 수단과 방법으로 방해하고 있는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요나가 제비뽑혔기에 요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요구합니다. 신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자를 어떻게 해야 될는지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는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처음에 요나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10절)라고 묻던 자들이 이제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는 잔잔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2절). 풍랑이 일게 된 것이 요나 자신으로 인해서 그렇다는 것을 요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였던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회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니느웨로 가겠다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풍랑에 대한 해결책을 요나 자신의 죽음이라고 요나는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면 바다가 잠잠해 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신에 대한 제물로 자신을 바치라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심청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제물로 신께 바치는 행위는 이교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나가 자신이 대속적인 희생의 죽음을 죽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요나서의 이 대목을 쉽게 이렇게 보아 넘기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이해할 때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중의 한 가지는 앞으로 읽어야 하는 뒤의 본문 내용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등장하면 그 사건의 결과들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지레짐작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간혹 뒷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본문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새롭게 본문이 이해될 때가 있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과 연결시켜서 이미 생각은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앞의 본문을 읽으면서 뒤의 본문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앞의 본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도 요나가 바다에 자신을 던져 넣으라고 말했을 때에 우리는 요나가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전혀 그러한 내용이 암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보면서 함정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 다음 내용이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나와서 다시 니느웨로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요나의 희생적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이적을 들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나서 자체가 이 대목에서 요나의 헌신적 희생이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 가서도 계속 요나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을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요나는 자신이 바다에 던져져서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렵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우리는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요나의 심정이 그러했는지도 모릅니다.
 
요나는 이미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미 죽기로 각오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너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라고 묻는 뱃사람들의 물음에 ‘내가 회개하면 된다’고 답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극단적인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스행 배 안에서 폭풍을 일으킨 범인으로 발각되었고, 선지자의 위신을 지탱할 수 없는 망신스런 지경에 봉착되었습니다. 점점 더 거칠어져 가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추적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 저를 죽이십시오!’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다에 던져 넣으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항변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가 해결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를 운항하는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13절).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를 살리면서 풍랑을 피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명확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요나 때문에 배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 요나는 배 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애써 외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이방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면 어떤 백성입니까? 이스라엘이란 보통 있는 이 땅의 한 국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9:5-6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리고는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드러내고 이방인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중보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나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방인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를 살리려고 하는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인들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배 밑에 들어가서 자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 죽도록 하라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지금 요나를 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지만 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그렇게 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죽으려고 하지만 이방인들은 그를 살리려고 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며 과거 요나가 외쳤던 예언에 의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것이 마냥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뻐하고 좋아해서 베풀어진 은혜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긍휼이 이방인인 니느웨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다는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점점 더 흉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서 요나를 죽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나를 바다에 수장시키기 위하여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성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나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에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방해만 받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사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고집과 자기주장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욕심이 죽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주님과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고전 15:31). 그것이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자랑거리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죽어야 할 것들을 우리는 자랑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우리는 자랑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다 불타버리고 없어질 것들을 우리는 붙잡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님의 일하심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주님이 오신다는 마음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것들을 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죽는 성도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모습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일하심을 그대로 인정하려고 하기보다는 내 생각을 가지고 말씀에 앞서서 행한 것은 없습니까? 아니 교회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가 무엇인가 부지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의 욕심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한 교회를 만들려고 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이 죽고 주님의 뜻만 나타나기를 날마다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세상적 욕심이 날마다 죽고 나를 통해 주님의 말씀만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