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1.요나 1:1-10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불편한 진리 2014. 4. 9. 14:21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요나 1:1-10
 
 
요나서를 떠 올리면 우리에게서 생각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요나서가 많이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요나서 이해에 대한 우리의 수준은 윤리 교과서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차를 이용해서 단체로 어디를 가다가 차가 고장이 난다든지 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중에 요나가 누군가?’하는 식으로 뼈(?) 있는 농담을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나서가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만큼 또 반대로 요나서에 대한 이해가 많이 삐뚤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선교’라고 하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것도 이방인 선교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붙잡혀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했으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고 선교하는 일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선교나 혹은 전도를 하자는 것에 매이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됩니다. 선교나 전도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보고 전도, 선교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요나서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선교나 전도를 전하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5:39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나서를 가지고 선교나 전도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가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요나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인 니느웨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방인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구약에서도 이방인에 대하여 심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요나서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니느웨를 회개시킬 목적이었다면 요나를 보내시지 않고 말 잘 듣는 다른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이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가 그렇게 거부할 줄을 모르셨겠습니까? 니느웨를 회개시키실 목적이었다면 요나가 거부할 때에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고 구해주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이 다른 선지자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니느웨를 중심으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한 선지자로는 요나 외에 호세아, 아모스가 있고 남쪽 유다에는 이사야, 미가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선포한 것은 심판과 남은 자에 대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엘리사가 뒤 이어 선포하였고 엘리사 다음에 밀접하게 연관된 선지자가 요나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예언이 실현 된 때가 바로 여로보암 2세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선포하신 역사 계획과 언약에 대한 성취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미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나 선지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어디에서 드러나야 하는가 하면 니느웨라고 하는 성읍에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곳에 말씀이 드러나야 그것이 가장 하나님의 말씀다운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이냐 구원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요나가 관심 가져야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오히려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욥바라는 항구에 가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서 그 배를 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배를 타고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데 마침 배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되면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지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한데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마음대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늘 자기 합리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요나가 왜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데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요나서 4: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인줄 알기 때문에 니느웨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 선지자의 시대적 배경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은 열왕기하 14:25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북쪽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 때에 이스라엘의 본 영토를 회복할 시기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번영을 누리게 된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을 요나가 선포하였고 또한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실행하신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이미 직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내리신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긍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수같은 나라인 앗수르의 니느웨에 하나님의 긍휼이 내려지는 것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타고 가는 과정 중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고 또 각자 자기 신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절).
선장은 배 밑에서 자고 있는 요나에게까지 가서 자고 있는 것을 책망하면서 너가 믿는 신께 간구하라고 요구합니다(6절). 그리고는 결국 제비를 뽑아서 이 재앙이 누구로부터 오게 되었는가를 가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으로 있는 그런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극도로 위험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풍랑은 신이 내린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신이 내린 것으로 본다면 누군가에 의한 재앙으로 온 것이라는 인식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신에 대한 관념이었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제서야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절)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낯을 피함으로 인하여 생긴 현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10절).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형편인 것을 고백하는 것을 볼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하여 능히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다는 것은 요나의 고정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요나서를 말씀하시는 것은 배 안의 모든 사람이 요나에게 집중하게 하심으로 요나에게만 아니라 요나가 속한 히브리 민족이라는 것에 집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처럼 자기들은 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례없는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지금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시시때때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성읍 니느웨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선포된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의 나라도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입장에서 허용되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모든 이스라엘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낯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편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죄인의 습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도 바로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성취를 이스라엘을 통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자기 언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가진 이스라엘이 선민 의식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야 할 곳에 드러내지 못하고 거부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요나를 부르시고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는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아니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우리를 장악하여 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산다는 것은 고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마음대로 부정을 저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할 수만 있으면 주님의 낯을 피하고 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의 낯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시편 기록자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고, 내가 마음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마음 편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오셨고 또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말씀으로 장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듯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생각,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선택하셨다고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과 상관없는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요나와 같고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말씀이 드러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말입니다. 내 삶의 편함을 위주로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씀을 드러내시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 일에 부름 받은 자가 성도요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쌓고 누릴 것인가 하는 일에 관심 가진 교회요 성도라면 늘 말씀과 세상이 부딪히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