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교회 주님의 교회

불편한 진리 2008. 6. 5. 20:27

인간의 교회 주님의 교회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든 불신자든 이미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불신자 나름대로 “교회란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대부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준에 어긋나는 모습이 드러나면 교회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이라고 하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였다고 하는 다른 교인들에게서 들어왔던 것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는 그렇게 되어지는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런 교회로 이루어가려고 한다. 예컨대, “교회란 재미가 있어야지”, “교회에 싸우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돼” 또는 “선교와 구제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라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교회를 주님의 십자가와 연관시켜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 목적을 두고 오셨고 십자가로 인해 발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라고 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여기서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온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다. 이 말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혈육)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가 말씀을 배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과 바로 아는 자들을 구분하여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즉 세상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는데 반해 주님을 따르게 된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8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부른 호칭에 대한 것이다. 17절에서는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셨는데, 18절에서는 “베드로”(반석)라고 하신다. 앞에서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18절에서 베드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16절의 고백이 있는 자 모두가 반석이신 예수님에 의해 반석(베드로)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주님에 대한 바로 이러한 고백이 있는 반석으로 인해서 시작된다. 즉 그 고백의 내용이 되시고 핵심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교회는 주님의, 주님에 의한, 주님을 위한 교회이다. 그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란,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을 자신의 주(主)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요, 그 주님에 의해 주님의 것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골 1:18).

마태복음 16:19로 좀더 진전해 보자면 예수님께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긴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흔히 말하듯이 천국 열쇠는 목회자에게 맡겼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못가고 하는 것은 목회자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 말씀은, 천국 자체가 열쇠이기 때문에 고백을 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 붙잡혀 있는 상태이다. 그런 자는 땅에서 어떤 원한을 당하든지 하늘에서 모든 것을 갚으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도가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으로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심판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성도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과는 반대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천국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뜻이다. 세상과는 반대되는 천국의 삶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는 삶이고, 그 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말씀 이후에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는 마태복음 16:21의 취지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반드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것을 만류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방금 신앙고백을 제대로 했던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는 것이다. 고난없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모두 사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십자가 고난을 제거한 복음을 선전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겪는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질 때에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신다. 고난이란 고생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것이 고난이다. 이 고난을 근거로 해서 교회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런 근거로 발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인간의 교회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교회라면 그것은 인간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교회는 십자가를 싫어한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십자가를 사랑한다.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알기 때문이다. 주님의 교회는 늘상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못난 점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못난 점을 항상 자각한다면 모임 속에서 경쟁이란 있을 수가 없다. 기도 경쟁, 은사 경쟁, 헌금 경쟁, 성경공부 경쟁, 전도 경쟁, 성전건축 경쟁 이런 일체의 경쟁들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주님의 몸 안에 지체로 보기 때문이다. 지체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지라도 서로를 질타하면서 경쟁하지 않는다(고전 12:24-27).

순수한 인간의 모임으로써의 교회는 인간 냄새로 채워지기 때문에 늘 자기 자신의 능력과 자존심으로 뽐내게 된다. 그것 자체가 우상 숭배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어떤 권세로도 무너뜨릴 수 없고 사람이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란, 자기가 스스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어서 모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자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이 교회이다. 이것을 주님의 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것이 아닌 주님의 교회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에 의해 살해당함으로 피흘려 사신 교회이다(행 20:28). 그것은 새 언약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가진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를 설명하시면서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눅 22:20).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흔적이다. 이 새 언약 안에 있는 자가 교회이다. 새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는 날마다 주님을 향해 대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와 피를 모독하는 편에 설 뿐이다.

그러한 인간의 행위는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모독하는 자들 안에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서 계속되고 있다.

교회를 인간의 것으로 만들고자 할 때에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걸러내고 자기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로 새롭게 탄생시키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귀하게 여기고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으로 고백하는 자를 새 언약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기준에 벗어나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말씀에 의해 회개하고 새롭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주님의 교회이다. 인간의 교회는 날마다 번성하고 부흥 성장하며 발전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의 교회는 날마다 십자가에 죽자고 고백하게 된다. 이미 알았던 십자가는 버리고 또 오늘 말씀으로 주신 십자가만 붙들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주님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이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임무는 사람을 모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함으로 인간의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앞에 걸림돌을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날마다 인간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임무를 가진 자이다. 그래서 주님의 피에 의해 날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교회라야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는 많다. 인간의 교회가 횡행하여 종교사업은 융성하다. 온갖 종교놀이로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는 일들은 풍성하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 피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이 교회라는 모임은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흉내낼 수 없다. 십자가는 흉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이 되는 예수님의 피는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교회는 윤리와 도덕으로 경건의 폼은 잡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는 교회의 모습은 흉내낼 수 없다. 주님의 교회 되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로 온전히 드러내시는 일,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