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기도 주님의 기도

불편한 진리 2008. 5. 31. 00:32


인간의 기도 주님의 기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기도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만 기도할 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도 기도하고, 이방종교의 신자들도 기도한다. 심지어 자신은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평소의 소원이 기도화 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다 기도하고 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도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들이 하는 기도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이야기 할 때에도 많이 한 것으로 생겨난 경험이 신학이나 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진 사실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성경 말씀에 근거한 원리나 신학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보니까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철저히 부정하신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형상을 입은(창 5:3)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항상 악을 쏟아 놓을 뿐이다(잠 15:28). 그러기에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결단코 듣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6:5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의 부당함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기도는 외식하는 것이었고(5절), 중언부언하는 것이었다(7절). 이는 인간들이 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외식하는 기도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라는 뜻이다. 즉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도와는 동떨어진 기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숨어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죄성과는 대조되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보이는 인간을 의식하면서 하는 기도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곧 뒤 이은 말씀에서 풀이해 주듯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방인과 같이”라고 했는데, 이방인이란 막연한 종교심으로 자기의 신에게 정성을 드리는 자들이다. 소위 말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기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범주 속에 다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는 기도, 평상시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하는 기도, 하나님의 힘을 빌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하는 기도,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의 기도,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하는 기도일수록 하나님이 잘 들으실 것으로 여기는 기도, 특별히 예배 기도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공격용 기도, 떼를 쓰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하는 단식 농성과 같은 금식기도,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면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응답해 줄 것으로 여기는 철야 농성과 같은 철야기도,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기도이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기도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외식된 기도가 되고, 자기의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는 지상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 시킨다”는 구호가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하는 기도는 지상에서 하늘에 있는 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리모컨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리모컨을 잘 조작하도록 부지런히 훈련시키고 있다. 시중에 나온 기도에 대한 대부분의 책은 ‘어떻게 하면 영력 있는 목사님만큼 기도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잘 받아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예수님이 그렇게도 철저히 거부하셨던 유대교의 기도를 재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과 치장된 종교적 경건을 염두에 두고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셨다. 어떻게 해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 때문에 한국교회는 고심하고 있다. 40일 새벽 기도 운동, 여리고 작전 기도, 다니엘 기도 학교 등 각종 기도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고안해 낸 것은 어떻게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고심한 흔적들이다. 만약 그러한 것들로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의가 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죄인 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롬 5:10). 그러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만들어지는 의라면 그것은 가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고 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의가 발생되게 할 수 없다.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자신의 죄만 더 크게 보일 뿐이다.

결국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인간의 실패이다.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주신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의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잠언 15:29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 외에는 모두 거부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받은 자이다. 그 의는 곧 하나님의 의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합류된 자가 기도할 수 있고, 또한 그 십자가 때문에 부르짖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신 것이다.

출애굽기 2:23-25에 보게 되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하게 된 경위가 고통이 왔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셔서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인간들이 부르짖어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는 과정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비언약 계통의 사람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공격을 당할 때에 (언약 안에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셔서 비언약 계통의 사람들을 척결하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측면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형성 과정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는(롬 8:22,23,26,27) 최후 심판에서 원수들을 심판하는 언약적 차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님의 기도는 응답되어 택한 백성의 운명을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고난과 죽음의 길로 몰고 가게 한다(벧전 2:21).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사정을 잘 아시는 성령께서 주장하시기 때문에 개인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전 2:10,11). 그것이 주님의 기도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8:25).

유대인들, 아니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살해 당하신 예수님,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요 14:13,14). 이 말은 인간이 자기 생각대로 구했더라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만 슬쩍 집어넣으면 응답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인간의 욕심이 포기되었다는 의미이다.

내 기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의해 주님의 뜻만 이루어진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러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요 또한 가장 효과 있는 기도인줄 알고, 우리는 주님의 기도만이 참된 기도로 인정하는 기도여야 한다.

야고보서 4:3에 의하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정욕이란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사항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언약과 배치되는 것이요, 언약과 배치된다는 것은 언약의 실체되신 그리스도와는 대적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심에 의해 치장된 기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기도이고, 또한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기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기도에 굴복시키지 않는 기도라면 수많은 정성을 들이고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맞추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언약에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알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하는 기도란 신을 초청해 오는 식의 기도이나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하시는 기도에 자기 백성들을 초청한 기도이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완성자 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구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욕망으로 구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나라, 그분의 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말만큼 마귀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도할 내용이 없다고 하는 말만큼 약속의 말씀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기도한 것에 대하여 응답하는 형식을 취해서 다시 오신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6:10). 그런데 기도한 성도들은 과연 어떤 자들인가? 요한계시록 6:9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고통과 죽임을 당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주님의 희생을 담는 기도가 아니라면 결국 자기를 위한 기도가 된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기도, 즉 부단히 자기를 죽이는 기도를 드리는 자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7.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