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일 주님의 일

불편한 진리 2008. 6. 7. 19:29

인간의 일 주님의 일

 

사람들의 관심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다. 끊임없이 일하고 분주하게 움직여야 해결된다고 믿고 있다. 거의 본능적이다. 이것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안식의 상태, 즉 누리는 상태는 에덴동산에 있을 때였다. 그 안식의 상태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더 이상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수고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살 수 있는 것이 저주 아래에 있는 땅의 법칙이다. 그리고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저주 아래에 있는 땅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이 교회에 나온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조금도 없다.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마귀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했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는 철저히 원수가 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복음이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 인간이 복음을 좋아하고 받아들일 리가 없다. 오직 자기 자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다. 인간의 바벨탑 쌓기 놀이란, 안으로는 늘 자기 자신을 위하고 위로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하나님조차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만들고(롬 1:23)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딤후 3:2).

그러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고 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인간은 어떤 것을 해도 자기 자신을 확고히 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가정의 일이든 직장의 일이든 인간사는 모두가 이런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훌륭한 아들로, 훌륭한 딸로 키웠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자녀들을 다그친다. 말로는 다 자녀를 위해서 이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서이다. 겉으로는 국가의 발전과 회사의 번영을 위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명예와 노후보장과 결탁되어 있다. 결국 신앙도 자기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이라야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다. 자녀의 입시 문제와 취업 문제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예수는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는 신으로 간주해 버린다.

예수를 믿어주는 대가로 일상사가 쉽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물질적인 복을 받고 근심 걱정없이 사는 일만 되게 해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당 문을 들어설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한국 교회는 이러한 죄인들의 기호에 적절히 맞추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죄성을 부추기며 이용하고 있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많이 모아 자기 세력화하는 일에 희열을 느끼고 있고, 교인들은 교회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도 잘살고 천국에도 가자는 심보이다. 예배당이 왕성한 것은 서로서로의 이런 요구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서 양산된 것이 소위 말하는 ‘성화’(聖化)요 천국 상급이다.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거룩하게 되어져 가고 천국에는 많은 상급이 쌓인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교인들에게 갖가지 율법을 다 동원하여 예배당에 붙잡아 두려 한다.

전도라는 율법, 기도라는 율법, 예배라는 율법, 십일조라는 율법, 봉사와 희생이라는 율법들이다. 언제 주님이 이런 것들을 율법으로 주신 적이 있던가? 종교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유전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는 온갖 인간이 만든 법칙과 율법으로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 안은 온통 싸움꾼들로 어지럽다.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많이 하나? 이 경쟁에 낙오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믿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란 결코 무엇을 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것에 의의가 있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인간 쪽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다(창 15:6).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도 자기에게 할 일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4)고 하셨기 때문에 자기 몸을 통해서 후사가 나오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 방법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의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보고 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그 약속의 후손은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다고 했다. 독생자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약속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실로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이 되었다(갈 4:28,31).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갈 3:7).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에게 13년만에 전능한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창 17:1).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이루어주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그분이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다.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변화산 위의 일과 산 아래의 일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변화산 위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로막고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과 더불어 살았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생각을 거부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하셨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서 한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눅 9:13).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한편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제자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 오셔서 고쳐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자신들은 어찌해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를 물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29).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기도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차원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신앙고백이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즉 마귀에게서 놓임받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일을 믿으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분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에 죽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만 들으면 된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일이란 교회봉사를 하는 것이나 사회 구제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십일조 드리는 것이나 기도나 예배도 아니며 전도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모든 일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다. 안식이란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이다. 이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인간이 노동을 멈추었는데도 불구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노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천국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이루신 천국을 받아 누린다는 것이다. 더 이상 천국에 우리가 추가할 것이라고는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나 승천하시고 난 후에라도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끝까지 예수님 홀로 이루시는 일이다. 십자가는 주님이 홀로 지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초막 셋을 지으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철저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주님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었으나 살아서 하늘의 보좌에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베드로가 이렇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이 베드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시시때때로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알려주시는 것이다(요 16:8,13).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필요하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구로 해서 일하실 것이다. 야고보 사도를 순교하게 하시는 주님은 또한 천사를 보내서라도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어느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 도구로 쓰시는 형편이 다를 뿐이다(행 12:1-11).

이것을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뻐시게 할 수가 없다(히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못믿고 있다.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고, 또한 앞으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데 대하여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수많은 이스마엘을 양산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일해서 만들고 있는 기독교 문화란 전부 이스마엘에 불과하다. 각종 전도훈련과 제자훈련, 행복한 가정만들기 세미나, 열린예배, 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 교회차량 늘이기, 성전(?)건축, 해외선교 부풀리기 등등 이루말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방법을 하나님의 약속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흔적들이다. 이렇게 인간은 순종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으로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한 인간의 행위로 예수님을 살해했다.

아직도 인간의 방법들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들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다. 우리를 대신 한 것이다. 왜 대신 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데 괜히 대신했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다 밝히셨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이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보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귀머거리요 소경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거나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이 백성이 도적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사 42:18-22).

그런 점에서 구약은,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고발장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낱낱이 공개하신 것이 구약이다. 따라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요 5: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의 기도, 봉사, 예배, 전도, 헌금에 의미를 두고 있다면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하여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주님께 대한 반항이다. 이스라엘이 제사로, 의식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실패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조리 실패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 의한 것 말고는 마지막 심판 때에 남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은 오직 어린 양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계 4:10,11). 그 천국의 모습을 지금 앞당겨서 보여주는 자들이 교회이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물으며 예배당에 들어오는 자들을 새신자로 등록시키는 일에 급급하지 않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여줄 수 있다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공연한 일거리를 가지고 노는 오락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의 흔적만 남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7.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