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전도 주님의 전도

불편한 진리 2008. 5. 30. 07:56

인간의 전도 주님의 전도

 

인간과 하나님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하나님은 거룩의 세계에 존재하시지만 인간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류하는 길을 하나님 편에서 마련하셨다. 곧 십자가의 길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뿐이다. 그러니 죄라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마 16:24-25). 그러나 사람들은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살려고 발버둥 친다.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은 다 죽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일은 반드시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선한 일을 한다는 것도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시큰둥하다.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기업에 유익을 준다기보다 자기가 편하게 잘 살아 보자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몸을 편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추스리는 일에 온 관심이 쏠려 있다. 자기 대에 잘 안되면 자식들을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이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 오직 자기 자신이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가 신이다. 인간의 사회생활이란 어느 신이 더 센가 하는 힘의 우열을 가리는 활동이다.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여 자기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나’라고 하는 신 밑에 작은 신들을 많이 두고 군림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기쁨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하는 전도다. 결국 인간들이 하는 전도란, 자기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전도에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 23:15에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전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사람들을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합작하여 이런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 예컨대 제자훈련, 전도훈련, 새 생활 세미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세미나, 총동원 전도주일 등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전도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교회를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 사활을 걸었다. 무지한 교인들은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는 목회자 나름대로 교인들을 자기 제자로 만드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목회자 자신이 신으로 군림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전도를 많이하여 교인들을 얼마만큼 많이 불렸는가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경을 가르쳐서 사회에서 선하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일에 일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도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목회자나 교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그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전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창세기로 먼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에 인간이 조금이라도 개입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욥 38:4). 창세기 1:26에서 “우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 자신이 의논 상대자가 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토록 안식을 누리도록 지음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의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마귀의 세력에 편승하였기에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에 매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누구도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그 권세에서 빼내 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란 바로 마귀의 세력에 붙잡힌 바된 자기 백성들을 빼앗아 오는 일이었다. 마태복음 12:28-30에 의하면 예수님의 전도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결박하여 그 세간을 늑탈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하고 거기에 눌려있는 자기 백성들을 모으는 일이 예수님의 전도였다. 예수님의 이러한 전도는 오직 십자가 사건을 향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앞으로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사역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의 문제로 인해 서로 다른 그룹을 형성하였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이렇게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고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사역은 실적 위주의 사역이 아니었다.

오늘날 각 기관에서 선교한다는 목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는가? 그래서 자신의 선교 실적을 나타내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일로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말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혹시 자신의 말로 하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울이 염려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만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전도란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 당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고, 의논 상대자가 될 수 없었다면,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 역시 인간이 개입하거나 하나님의 의논 상대자가 전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인 결정과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인 권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드러내는 일 역시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임이 명확하다. 이런 점에서 전도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무리 하실 일이다. 다만 인간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등장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쓰실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라는 것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말로써 상대방이 예수믿게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들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 전도이다(요4:36-38).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게 하셔서 철저히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이다(고전2:4-5).

일반적으로 전도가 교인 수를 채우는 것이요 교회의 세력 확장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이라는 빌미아래 교인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와서 예배당을 채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까지 가르치고 또한 배워온 것이 사실이다. 전도란 사람을 구슬려서 예배당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전도라면 주님의 전도는 복음의 일방적인 선포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다. 우리가 십자가만 전함으로 그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고전1:23-24). 그래서 신자의 전도란 그냥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누구신가를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해야만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구분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8:23이하에 의하면 바울 사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하고 증거했다. 성경을 가지고 오직 예수의 일만 전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에 바울 사도는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28:26-27). 그래서 바울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의 전도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그 실적을 기록함으로 사도행전을 끝맺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고 끝맺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교인수에 관심이 없었다. 베드로의 전도로 3,000명씩 5,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하는 본문을 들어서 우리는 교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묘한 마귀의 술책일 뿐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의 수를 기록한 것은 주님이 살아계셔서 계속 일하신다는 증거로 말할 뿐이다. 우리는 그 숫자가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기보다는 그 많은 신자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각 처로 흩어졌다는 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결코 그들이 그 숫자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모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의 증가에 자극을 받아 ‘이제는 10,000명을 채우자’하는 식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극을 받아서 전도할 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전도의 핵심은 과연 신자로서 바른 복음을 얼마나 바르게 전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사람들을 예배당에 얼마나 모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자로서의 삶이냐 하는 것으로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생활 자체가 전도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증인이라고 한다(행1:8).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가 아니라 보여주는 종교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천국이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할 때에 십자가를 무시하는 비언약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어떤 자인지, 반대로 십자가가 자신의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언약백성이 어떤 자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해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걸러내는 작업을 하셔서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 구원받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도란, 전도라고 하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방법을 추가한다는 것이 인간의 전도이고 그 인간의 전도는 주님의 전도를 항상 방해하는 것이 된다.▶「예수사회」 1997년 4월 25일 제33호(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