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성전 주님의 성전

불편한 진리 2008. 6. 18. 09:36

인간의 성전 주님의 성전

 

인간들의 종교생활은 어떤 의식이라는 틀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상관이 없다. 신이 존재하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나를 위해 존재해 계시는 신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의지할 대상이 있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신으로서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종교성은 성경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기에 충분하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도 교회가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가 그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서 위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가는 것만으로 천국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때문에 굳이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에서 알려주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거기서 흘리신 피, 예수라는 이름 등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용히 예수 믿다가 자신만 천국에 가면 그만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에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는 식이다. 바로 그 종교성이 죄의 본성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독교는 죄의 본성으로 찌들린 우리의 종교성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종교성이 말씀의 본질을 왜곡되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3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성전청결”(?)에 대한 본문이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나타내고자 하셨던 의도가 무엇일까? 성전정화 내지는 성전청결 정도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이 더렵혀 놓은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는가? 아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부터 지적하고 있는 한 가지 사항은 인간은 어두움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세상에는 도무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인간은 의인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의 장사로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인간에게 희망을 가지시겠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정화” 내지는 “성전청결”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만약 그렇게 제목을 붙인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셔야 맞을 것이다. “자! 이제 성전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다시는 장사하는 일이나 돈 바꾸는 일로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하는 일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는 말씀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에 성전은 장사하고 돈 바꾸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고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고 대답하셨다. 과연 성전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이 성막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직 여기서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서만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계시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성막이 아니면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솔로몬 때에 고정된 성전으로, 성막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성전을 이용하고자 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을 경건하게 내비치고자 하는 일에 성전을 마음껏 활용하는 것이었다.

요시야 왕은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제도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율법의 말씀을 읽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시절이 있었다(대하 34:8-21). 그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2-4)고 선포했다.

성전을 수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언약의 말씀에 합당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언약의 땅에 살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언약의 땅은 언약의 백성만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땅은 언약의 말씀에 위배된 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상황만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될 자들이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성전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성전이 아니라 시장이 된 것이다. 성전이 인간들의 죄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성전을 가지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조차도 제대로 유지하고 보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성전을 재건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이 말씀은 이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행위를 거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성전을 파괴하고 새로운 성전, 즉 삼일만에 세워지는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새로운 성전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마태복음의 표현대로 실로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셨다(마 12:6).

요한복음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 여기 “거하시매”라는 말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출애굽기 25:8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성막)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짓도록 명하신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으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사신다는 표시였다. 궁극적으로 성막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인간들 가운데 거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하는 것이 구원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교제의 통로가 오직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서 자신을 제공하러 오셨다. 그것을 구약에서 성막, 성전으로 가시화해서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전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함을 밝히시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건물로써의 성전은 무의미하다. 두 개의 성전이 존재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만으로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통로이다. 그 통로 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허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이 개인적인 정결 의식을 공격하신 것이라면, 성전 소란은 이스라엘 전체가 귀중히 여기는 성전을 공격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종교 행위에 대하여 공격하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항상 성전을 공격했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10이하를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

하나님은 성전으로 제사 제물을 가져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가지고 악이라고 규정하신다. 하나님은 제사를 즐기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원하신 것은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었다(렘 7:22-26). 그러기에 언약의 말씀과 관계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기에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신앙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전을 공격의 목표물로 삼았던 것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성전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보았어야 했다. 그들은 성전이라고 하는 포장지에 싸여진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46년동안 지어진 성전이라고 그것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벽돌로 지은 건물에 십자가만 걸쳐 놓으면 성전으로 둔갑하고 있다. 일단 성전으로 둔갑된 것에는 무한한 종교적 경건과 거룩성이 마음껏 가미되어도 괜찮다. 가능하면 예배당의 엄숙함과 경건성에 위축되도록 치장하려고 이교적인 신전의 모습을 따오기도 한다. 또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도 무방한 것이다.

할수만 있다면 모든 성경 구절을 끌어다가 하나님이 성전(?) 안에 눈을 부라리고 계신다고 증명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될 수 있으면 예배당에 나와서 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잘 들으신단다. 교회에 봉사하도록 묶는 것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배당에 한정시켜서 섬김과 봉사를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성전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어리석은 민중들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를 천국에 넣어주는 교회라면 거기에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떤 거짓말도 들어줄 용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성전건축’에도 얼마든지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거창하고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에 하는 투자는 내가 천국가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질세라 목회자들은 민중들의 그러한 종교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성전건축을 위한 세금고지서 발부는 성경에서 뒷받침해주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출애굽 때에 성막을 건축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귀중품을 바친 것과 학개서 1:8의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근거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 그것은 현대판 바벨탑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믿음에 관한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예수님을 보이는 목사로 바꾸려고 한다. 하늘나라를 보이는 예배당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예배당을 거창하고 엄숙하게 꾸미려고 한다.

거기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많은 교인들은 주님을 인간의 성전이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 놓고 있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만드는 인간의 성전을 두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마 8:20).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예수님을 좇는 무리이다. 그렇다면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우리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줄 알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버젓한 예배당 건물이 없으면 어떠한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당을 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이루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성전을 고집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오늘날도 예배당을 성전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님은 한국 교회에서 자꾸 밀려나고 계신다. 성전은 없다. 구약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의 성전은 십자가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자기 백성들을 성전으로 삼으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16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전으로 삼으셨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인 교회이다.

이제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성전만 남았다. 그러기에 지금 신자들의 임무는 주님의 몸만 남기는 일이다. 주님의 몸 외에 어떤 것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나 중심의 기도라면 주님의 몸과는 이질적인 요소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서 위해서 하는 찬송이라면 유행가와 다를 바가 없고, 한 주간의 액땜이라도 하겠다는 식으로 드려지는 예배라면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삼상 15:23).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바벨탑을 쌓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만 남기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어디까지나 가진 것에서 더 불리고 늘이는 소유의 축적이 아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에 순종의 의미가 있다.

구원이란 나의 일생이 어느 방향으로 길이 잡혀 있느냐의 문제로써 소유가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것들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관계없는 인간의 성전을 무너뜨리고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199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