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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52강
출애굽기 22:18-31
거룩한 사람
열 말씀의 구체적인 규례들이 계속 주어진다. 열 말씀이 윤리 도덕적인 행동을 규정하는 법이 아니듯이 이런 세부적인 규례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언약의 말씀이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18절). “무당”의 ‘카샤프’는 ‘마법(마술)을 행하다, 미혹하다, 주문을 속삭이다’라는 뜻인데 여성형 명사로 ‘무녀’를 가리킨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무당이나, 무속인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술객들에 대하여 사용된 것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 보여 주었듯이 바로를 대변하는 자로 술객들을 내세웠다(출 7:11). 이런 점에서 모세에 대응하는 존재로 바로의 중재자, 즉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로 나타내는 존재를 가리킨다.
“살려두지 말라”를 ‘로 하야’로 표현하였다. ‘로’는 부정어로 ‘아니다’라는 뜻이고, ‘하야’는 ‘살다, 살아 있다, 생명을 유지시키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 중재자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중보자도 존재할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고, 인간 중재자를 통해서는 생명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가 복음을 빙자하여 중재자처럼 행세하면서 복채(헌금)를 두둑이 챙긴다. 하나님과 세상을 중재한다고 하는 음녀의 모습이다(계 17: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스스로 중재자가 되고자 하는 죄성을 죽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의 믿음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9절). “짐승”의 ‘베헤마’는 ‘네발 가진 짐승, 야수, 가축’이라는 뜻으로 땅적 존재를 지칭한다. 즉 예수님을 육체로만 아는 자들이 짐승이다(벧후 2:12, 유 1:10). 육체의 예수만 알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지 못한다. 곧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일에 동조하고 그들과 교제하며 함께하는 자들이 짐승과 행음하는 것이다(계 13:1-18). 언약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상태의 우리가 짐승과 행음하는 자들이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20절). “다른 신”이란 ‘다른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멸할지니라”의 ‘하람’은 ‘성별하다, 바치다, 격리하다, 금지하다, 바치다, 전멸하다’라는 뜻인데 기본적으로 ‘어떤 물체를 사람이 사용하거나 남용하지 못하도록 제외시켜 그것을 하나님께 넘겨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은 죄인들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사로 드려진 존재로 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겉사람이 반드시 죽어 멸망의 상태가 되어야 속사람이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안에서 함께 이루신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1-24절). “나그네”(22절)의 ‘게르’는 ‘손님, 거류자, 이방인, 타국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외국인 거주자를 가리킨다.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외국인 거주자들이었다. 애굽은 세상의 힘으로 압제와 학대를 가했기에 거기서 벗어나 힘으로 더 큰 세상을 얻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애굽의 힘은 죄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늘 본향의 목적지를 가지게 된 자가 나그네이다(히 11:13-16).
“과부”(22절)의 ‘알마나’는 ‘과부, 버려진 곳, 황폐한 집’이라는 뜻으로 남편의 사망으로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잃은 여인을 말한다. 남편이 없으니 버려지고 황폐한 집이 되었기에 성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가 된 후 성전이 황폐하게 되어 과부로 지낸 것이 그들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남편으로 여기지 못한 모습이었다. “고아”(23절)의 ‘야톰’은 ‘유족, 아버지 없는 자(fatherless), 홀로 있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나그네, 과부, 고아는 없는 자들이다. 본향이 없고, 남편이 없고, 아버지가 없는 자이다. 결핍과 부족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은혜로 이끌어 주셔야만 되는 존재이다.
“해롭게 하지 말라”(22절)라는 말씀은 그 상태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의미이다. 즉 말씀의 기근이 있는 심판 가운데 두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24절)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셔야 한다. 이런 점에서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21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언약의 땅에서도 나그네, 과부, 고아를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계속 계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그네, 과부, 고아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것은 그들의 어려움을 무조건 들어주심으로 해결사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약자요 소외당한 자로 오셔서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을 계시한 말씀이다. 우리의 구원은 나그네요 과부와 고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약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만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25절). 사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는 일은 없다. 돈을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부자들인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율법적 행위를 전하는 것을 비유한 규례이다. 그리고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문자의 행위를 열심히 할 것을 강요하는 종교적 행위를 비유한다.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 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 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 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3:19-20)
그러니까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는 이자, 즉 율법적 행위를 강요할 수 없지만 이방인에게는 율법적 행위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분이 오셔야 한다. 그냥 주시는 것으로 가난한 자를 속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한다는 언약의 말씀이다.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26-27절).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26절)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게 유일한 겉옷으로 밤에 이불이 되기 때문이다. 담보물로 잡은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면 사실은 담보물을 잡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규례이다. 겉옷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거두어 버리면 죄인은 그 자체로 죽음이고 멸망의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27절)라고 말씀하셨다. 실제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 2:6-8)
가난한 자의 옷을 담보물로 잡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그 옷을 깔고 누워 포도주, 즉 비진리에 취해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선포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적 행위로 수치를 드러낼 뿐 가려줄 수 없는 자들이었다. 결국 가난한 자들이 옷 벗김을 당하고 수치의 상태에 있는 이런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셔야 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알몸을 가릴 옷이 없는 상태로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28절). 여기서도 “재판장”(28절)을 ‘엘로힘’으로 썼다. “지도자”(28절)의 ‘나시’는 ‘들어 올려지다, 우두머리, 군주, 왕, 지도자’라는 뜻이다(겔 34:24, 37:25).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지칭하는 것이고 곧 엘로힘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재판장과 지도자를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자를 대적하는 것이다. 언약의 후손으로 오실 실체를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한다면 그것이 복이다(참고 창 12:3, 27:29).
그래서 “29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30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29-30절)라고 초태생에 대해 말씀한다. 처음 것을 바친다는 것은 나머지 것들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출 13:2). 애굽의 처음 난 것을 치셨으나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대신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추수는 완성이요 충만이다. 이는 처음 익은 열매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한 것, 처음 익은 열매, 짜낸 즙, 처음 난 아들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것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다시 말해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의 말씀을 완성하고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레”(30절)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을 확인하고, “여드레”(30절)로 새로운 날의 부활로 완성을 의미한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31절). “들”이란 성전 바깥을 의미하고 “짐승”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추종한 자들은 말씀과 분리되어 찢겨 죽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 결국 “너희”(히, ‘에노쉬’)라는 죄인을 율법이 계시하는 진리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요 17:17). 거룩한 사람은 언약의 완성이신 거룩한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엡 1:4).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 2:21-23)
(202603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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