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51. 출애굽기 22:1-17 완전한 배상

불편한 진리 2026. 3. 2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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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51강

출애굽기 22:1-17

완전한 배상

 

열 말씀의 연장선에서 계속 구체적인 규례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제사장 나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율법 잘 지킴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 이루신다. 이렇게 함으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 나라와는 다른 제사장 나라로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다. 결국 오늘 본문의 규례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1절). “소”는 이미 21:28-36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꾼을 의미하고, “양”은 일꾼에 의해 양육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다섯 마리로 갚으라고 한 것을 보면 율법에 매여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양에 대해서는 네 마리로 갚으라고 한 것은 율법에 매여 말씀을 도둑질하여 세상적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여 율법의 종으로 넘기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비유이다.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19-21)

 

언약이 다윗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다윗을 통해 언약을 드러내시겠다는 뜻이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범하는 것을 통해 죄악은 다윗 밖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언약으로 보여 주신다. 그래서 언약의 말씀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다윗의 죄악을 폭로한 나단의 비유에서 다윗은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6)라고 한 것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이 언약의 말씀을 사유화하는 도둑질이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었다(삼하 12:9). 삭개오 역시 이런 차원에서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예수님께 고백하였다. 다윗이나 삭개오가 네 배를 언급한 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보면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배상액이 너무 크다고 생각할 것이고, 피해자의 입장이 되면 당연히 법대로 실행된다고 할지라도 소유의 중요성에 따라 판결한 배상액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소나 양이 필요하여 도둑질한 자에게 배상은 불가능하고 또한 배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서로에게 흡족할 수 없다. 그러기에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모두 온전한 배상을 받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면 빚으로 쌓인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빛을 탕감해 주시는 분이 오셔야만 온전히 성취된다.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2-4절). 밤에 든 도둑을 죽이면 정당방위이고, 낮에 든 도둑을 죽이면 과잉방위로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밤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문자라는 어두움 안에서는 모두가 도둑이고 도둑질당하는 죄악의 상태이기 때문에 피 흘린 죄가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그러나 해가 돋아 빛이 비치고 분별할 수 있는 상태, 즉 진리가 진리로 온전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죄인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으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율법의 문자에 사로잡혀 살해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4-5)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과 교훈으로 가르친 도둑질은 반드시 배상을 해야 하는데 도둑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도둑의 몸값을 받든 배상금 대신 종으로 삼더라도 부족한 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율법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말씀을 다 이루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법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위한 선악 체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간은 율법을 통해 불의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씀을 완성하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가 언약 백성이다.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5-6절). “짐승”(5절)이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육의 상태, 땅적 존재를 가리킨다. “포도원”(5절)과 “남의 밭”(5절)은 이스라엘이요 곧 교회를 의미하는데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있고 음녀인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불”(6절)은 종교적 열심을 의미하는데 그것으로 남의 밭의 양식을 파괴하는 것이 짐승과 같은 거짓 교사와 일꾼들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5절)으로 배상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배상이 될 수 없다. 짐승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땅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한 배상은 언약 안에서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7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집에서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8 도둑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9 어떤 잃은 물건 즉 소나 나귀나 양이나 의복이나 또는 다른 잃은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양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지니라”(7-9절). “돈”(7절)은 ‘케세프’로 속전을 뜻하고, “물품”(7절)의 ‘케리’는 ‘물품, 용기, 기구’라는 뜻으로 주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물품을 의미한다.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을 계시한다. 돈이나 물품을 “이웃”(7절)에게 맡겼다는 것은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넘겨주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킨다는 것은 언약 백성들이 말씀에 대한 울타리를 치고 있는 상태에서 울타리를 넘어오는 도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둑이 훔친 그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 자체가 배상이 되는 것이다.

“잃은”(9절)의 ‘페사’는 ‘반역, 범죄’라는 뜻이고, “물건”(9절)은 ‘다바르’로 ‘말씀, 일, 사건’이라는 뜻이다. 즉 말씀을 받은 자가 자신의 임의대로 해석하여 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언약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그때는 말씀을 넘겨주신 분 앞에서 인위적으로 손댄 것에 대해 다시 확인받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재판장”(8, 9절)을 ‘엘로힘’으로 표현하였다(새번역성경은 “하나님”으로, 공동번역과 가톨릭성경은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말씀을 넘겨받은 자에게서는 오직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야 한다.

“10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 만일 자기에게서 도둑 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10-13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지만 말씀에 의한 소유가 마음에 지켜지지 않아서 복음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즉 행위의 법과 마음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문자의 율법에 능통한 자들에게 죽음 가운데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 행 20:29-30).

따라서 이런 일이 이웃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기게 되면 서로가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씀은 성취된다. “맹세할 것이요”(11절)라고 번역하였는데 ‘세바’, 즉 ‘일곱’이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야훼께 일곱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만약 이웃에 그의 소유에 손을 뻗지 않았다면 그의 주인은 일곱을 취하라’라는 말이다. 즉 일곱이 배상 그 자체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14 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15 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있었으면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만일 세 낸 것이면 세로 족하니라”(14-15절).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죽이는 문자에 불과한 것이다. 세를 내고 빌려온 것에는 배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자체에 예상되는 손해금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상하거나 죽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그 손해를 담당함으로 상하고 죽게 되신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표현된 말이 “갚고”(1절),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배상할 것이요”(3절), “배상할지니라”(4절), “배상할지니라”(5절), “배상할지니라”(6절), “배상할 것이요”(7절), “배상할지니라”(9절),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11절), “배상할 것이며”(12절),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13절), “배상하려니와”(14절),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15절)라는 말씀인데 전부 다 같은 단어 ‘샬람’으로 ‘보답하다, 가득하다, 온전하다, 완전하다, 완성하다’라는 뜻이다. 배상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샬롬’(평화, 행복, 안전, 번영, 화목)이 유래하였다. 그러니까 배상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되는 것이고 온전함은 원수 관계였던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평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배상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평강의 상태가 되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상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배상하여 온전하게 되는 것인가? 인간은 온전한 배상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배상을 하신다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배상으로 이루어지는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전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이렇게 볼 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로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 하는 죄인을 화목의 상태가 되게 만드신 것이다.

“16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16-17절). “약혼하지 않은 처녀”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육체의 예수를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꾀어”라는 말 때문에 오해를 하는데 히브리어 ‘파타’는 ‘열려 있다. 넓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처녀를 찾아와 복음으로 넓게 열려 있는 상태로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납폐금”, 곧 ‘결혼 지참금’(히, ‘모하르’)을 주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이 진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완전한 배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강의 상태이다. 결국 배상에 대한 율법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배상을 할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인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이다(202603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출51.2201-17 완전한 배상(202603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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