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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49강
출애굽기 21:15-27
생명을 대신하는 생명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표현은 ‘무트’를 강조하여 죽이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문자의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죽여 자기 언약 백성으로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처음 율법으로 행하는 육의 죽음 후에 복음으로 죽여 진리로 다시 살게 하신다는 언약이다.
“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5-17절). “아버지”, “어머니”는 성전이요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모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아버지이다(신 6:7). 아버지가 언약을 아들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조상 야곱이나 이삭, 아브라함은 아버지이며 부모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언약의 조상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런 부모를 “치는” 심판을 행한다는 것은 언약의 말씀이 아닌 문자의 율법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5절의 부모를 치는 것과 17절에서 부모를 저주하는 것에 대한 말씀인데 문제는 그 가운데 16절에서 사람을 납치한 것에 대한 율례가 주어진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본으로 전해져 오는 과정에서 문맥에 맞지 않는 문장이 잘못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납치”(16절)의 ‘가나브’는 ‘훔치다, 도둑질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람”(16절)을 ‘이쉬’(남자, 사람, 남편)로 표현하였는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신명기에 보면 같은 말씀을 이렇게 기록한다.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
납치는 형제에 대한 말씀이다. 야곱의 가족 중에서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다. 야곱의 가족은 단순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졌기에 언약이 담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안에 형제란 하나님의 언약을 담은 형제를 도둑질하여 살해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히브리”(창 39:14, 17, 40:15, 41:12, 43:32) 사람이라고 불린다. 즉 죽음을 건너온 자로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야곱 언약 안의 요셉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렇다면 형제를 납치하여 죽이는 율례를 통해 성경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즉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는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납치하고 살해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이 규례를 통해 보여주신다. 그러니까 15-17절의 말씀은 단순히 부모에 대한 말씀에 납치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율례가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말씀이고 이 가족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육의 가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 왕국의 가족, 곧 예수 그리스도 안의 관계를 계시하는 말씀이다(마 12:50).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친다(마 26:59-62). 유대인들이 말씀으로 친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로, 사람의 계명과 교훈으로 치는 것이다. 즉 다른 복음으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부모를 치는 것이다. “저주하는”(17절)의 ‘칼랄’은 ‘하찮다, 시시하다, 보잘것없다, 가볍다, 빠르다’라는 뜻이다. 즉 출애굽을 경험한 부모가 언약의 말씀을 보잘것없고 가벼운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4-6)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겨 드림이 되었으니까 부모에게도 드리는 것이 되어 부모 공경함을 다 하였다는 것을 “고르반”(막 7:11)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코르반’은 ‘제물, 헌물, 예물’이라는 뜻인데 ‘카라브’(가까이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찾아오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문자의 율법을 다 이루었으므로 더 이상 진리의 말씀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결국 율법 아래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죽은 존재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 율법이다(롬 7:9-10).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오해하여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사망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18-19절). “사람”(18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에노쉬’로 표현하였고, “하나가”(18절)라는 표현은 ‘이쉬’(남자, 사람)로 썼다. “싸우다가”(18절)의 ‘리브’는 ‘싸우다, 다투다, 경쟁하다’라는 뜻이다. 다툰다는 것은 르비딤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미 잘 보여주신 내용이다. 물이 없어 모세를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낸 것을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툰 것으로 말씀하였으나(출 17:7) 민수기에서는 여호와와 다투었다고 말씀한다(민 20:13). 그리고 아말렉과 다툰 전쟁이 있었다(출 17:16). 이 두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다투는 죄인은 진리의 말씀이 없는 상태임을 폭로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먹는 문제는 믿음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셨다.
“자리에 누웠다가”(18절)라고 번역하였는데 ‘침상에 누워 있다’라는 말로 죄 가운데서 전혀 움직일 수 없어 죽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참고 마 9:2). “그간의 손해”(19절)의 ‘셰베트’는 ‘샤바트’에서 유래한 단어로 ‘중지, 쉼, 가만히 있음’이라는 뜻이다.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19절)의 ‘라파 라파’는 라파를 두 번 강조하여 ‘완전한 치료’를 의미한다.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쉼을 넘겨주고 완전히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치료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규례도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 아래에서 도무지 살아날 수 없는 자들을 처음 율법으로 죽이고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함으로 안식을 넘겨주실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19절)이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참고 약 4:1-6).
“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20-21절). “연명하면”(21절)의 ‘아마드’는 ‘서다, 머무르다, 지탱하다’라는 뜻이다(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루 이틀 뒤에 일어나면”이라고 번역하였다). 종은 주인의 것이다. 그러기에 종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율법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것으로 죄 아래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면 주인의 것으로 일으켜 세워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22절). “사람”은 ‘에노쉬’(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싸우다가”의 ‘나차’는 ‘싸우다, 황폐하게 하다, 파멸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한 다툼이 아닌 황폐하게 하고 파멸하는 것이다. “낙태”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야차’는 ‘나오다, 나가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이끌어 내다’라는 뜻이다.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다른’이라는 표현은 없다. “해”의 ‘아손’은 ‘재난, 재해, 재앙’이라는 뜻이다(창 42:4, 38, 44:29). 그러니까 본문에서 낙태라는 개념은 없고 출산하였기에 재난이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재판장’이라는 단어는 없고 “판결”의 ‘파릴’은 ‘파랄’(중재하다, 기도하다)에서 온 단어로 ‘판단, 판결, 사정, 평가’라는 뜻이다. 피해자의 남편이 벌금을 청구하는 것으로 인해 이는 중재의 기도 안에 넘겨주라는 말씀이다. ‘에노쉬’의 싸움은 서로를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것이다. “임신한 여인”은 언약적 관점에서 교회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을 잉태한 자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온전한 진리로 낳지 못하고 불완전한 사람의 계명과 교훈으로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주인이시고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보자의 기도를 진리로 넘겨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2-25절). 이 말씀을 근거로 흔히 피해를 입은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데 예수님께서는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라고 율법의 본질을 밝혀주셨다.
이런 점에서 이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으로”는 ‘타하트’로 ‘바닥, 아래에, ~대신에’라는 뜻으로 ‘대신한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생명을 대신하는 것은 생명, 눈을 대신하는 것은 눈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대로 대신하여 자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따라서 대신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아 언약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결국 예수님의 눈, 손, 이, 발을 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마 26:67).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27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26-27절). “쳐서”는 ‘나카’로 ‘치다, 때리다, 죽이다’라는 뜻이다. 즉 상한 한쪽 눈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이다. 그러기에 심판으로 인해 한쪽 눈을 상함으로 자유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양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는 이가 빠지게 되면 자유를 얻는다. 스스로 눈이나 이를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히, ‘이쉬’), 곧 주인이 한다. 주인만 자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끊어 내버리신다면 그것이 자유이고 안식이다. 생명을 대신한 생명은 오직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은혜이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8-10)
(202603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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