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43.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좁은 길

불편한 진리 2025. 5. 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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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43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힘들게 핍박을 당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공휴일이라 자기 여가를 즐기지만 나는 주일성수하며 예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라든지, 휴가 때 다른 사람들은 여행을 가지만 나는 교회 수련회에 참석함으로 좁은 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일에만 예배 나오는 사람보다도 수요예배,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는 사람은 적어도 참석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좁은 길로 간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봉사로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 좀 더 복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나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힘들어도 땅의 것을 거부하며 위의 것을 찾는 삶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을 써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고 길이라면 결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죄인들의 종교성에서 나온 길에 불과하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절). “좁은”의 ‘스테노스’는 ‘폭이 좁은, 얇은, 가난한’이라는 뜻인데 ‘히스테미’에서 유래한 단어로 ‘장애가 서 있음으로 좁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의 ‘퓔레’는 ‘문, 입구, 통로’라는 뜻인데 복수 형태는 주로 ‘성문’을 지칭한다. 그런데 “좁은”에 ‘호’라는 관사를 붙이고 있고, “좁은 문” 앞에 ‘디아’(~을 통하여, ~와 함께)를 쓰고 있다. 즉 “좁은 문으로”라는 말은 ‘그 좁은 문을 통하여’ 혹은 ‘그 좁은 문과 함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좁은 문을 통해서’ 가는 것은 도구가 되지만 ‘그 좁은 문과 함께’로 이해한다면 좁은 문 자체와 함께 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멸망으로”라는 표현은 ‘에이스’(~안으로, ~로 향하여, ~을 위하여)를 썼다. 그리고 “인도하는”(13, 14절)이라는 말의 ‘아파고’는 ‘데리고 가다, 인도하다, 끌어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13절)이라는 말은 ‘멸망 안으로, 멸망을 향하여 이끌려 간다’라는 의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이라는 말은 ‘좁은 문이 함께 이끌고 간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 말씀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 보면 실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a)라고 말씀하기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힘쓰라”라는 말의 ‘아고니조마이’는 ‘싸우다, 다투다’라는 뜻이다. 싸우는 힘을 쓰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런데 그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b)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맥을 좀 더 보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눅 13:25)라고 하였다. 즉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집주인의 권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선택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였다. 이런 점에서 “적음이라”라는 말의 ‘올리고스’는 ‘작은, 소수의, 약간’이라는 뜻이지만 그 적음, 소수도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1-2, 5-6)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는데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에서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롬 3:10). 즉 “복 있는 사람”(복 있는 그 남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으로 의인들을 만드셨기에 의인들의 길을 가게 된 자들이다.

그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하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당연히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어떤 사람이든 다 멸망의 길을 자동적으로 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좁은 문, 좁은 길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면서 생명의 길이기를 바란다. 잠언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16:25)라고 말씀하기에 내 생각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생명의 길은 어떤 것인가? 창세기 3장의 말씀을 보자.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범죄한 자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 놓으셨다. 즉 죄인이 결코 영생의 길을 갈 수 없도록 차단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힌트를 주신 것은 생명나무의 길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막아 놓았다는 것인데 이 말을 다른 면으로 하면 언젠가 이 생명나무의 길을 열어서 생명, 곧 영생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생을 누리는 길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한다(요 5:39-40). 유대인들이나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서 성경을 거의 외우는 상태였고 목숨 걸고 성경을 필사하고 상고하며 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날마다 연구하면서도 실제 영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영생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구약의 말씀 전체가 메시아에 대한 것이며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통해 ‘그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으나 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목자로서 문이 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들어가는 양의 문으로 생각한다면 성전 문이다. 그렇다면 넓은 문은 유대인들이 제사 제물을 가지고 성전 뜰까지 들어갈 수 있는 문이고, 좁은 문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의 문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멸망 안으로 이끌려 가는 문이란 제물을 가지고 성전 마당까지 들어가서 제사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생명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대제사장 한 사람이 속죄를 위해 들어가는 그 문이 생명의 문이라는 뜻이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1-6)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밝히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문이며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좁은 문, 좁은 길을 가셨기에 예수님만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신 것을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사 제물을 가지고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 문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아니라 오히려 넓은 문, 넓은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넓은 문이 있고 좁은 문이 따로 있어서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넓은 문, 넓은 길을 간다. 멸망을 향해 이끌려 가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넓은 문, 넓은 길 그 가운데서 좁은 문, 좁은 길에 이끌려 가게 하신 자들이 따로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완벽하게 행하여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려고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넓은 문이요 넓은 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율법을 완성하시고 온전히 이루실 것이기에 자신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하신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7-8절)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구하면 주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백성, 자기 아들에게 문이 되어 주실 것이고 그 길에 함께하여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좁은 문”이 장애물이 있는 문이라는 뜻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장애물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협착하여”라는 말의 ‘들리보’는 ‘압박하다, 억압하다, 괴롭히다, 환난을 받다’라는 뜻인데 성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들리보)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들리보)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그러므로 “길이 협착하여”라는 표현은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려 가는 것 자체가 환난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자가 죽음 안에서 의인으로 만드셨기에 우리가 악인의 길을 거부하며 의인의 길을 가게 된 것이고, 그것이 환난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고행으로 하는 것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문이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려 함께 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남을 대접하신 방식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생명의 문이요 길로 인정하게 된 것은 많은 종교 중에서 기독교를 선택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좁은 문, 좁은 길에 함께 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은혜이다(202505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43.0713-14 좁은 문 좁은 길(202505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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