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38. 마태복음 6:16-18 금식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25. 3. 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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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38

마태복음 6:16-18

금식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구제와 기도, 금식을 경건 생활의 아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관행을 따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 사실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금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경건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마 9:14 / 막 2:18 / 눅 5:33).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경건을 위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있던 것들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그 본질적인 뜻을 밝히셨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6절). “외식”이란 말의 ‘휘포크리테스’는 ‘휘포’(~아래)와 ‘크리노’(판단하다, 심판하다)의 합성어로 ‘아래에 속하여 판단하는 것’ 곧 땅의 것으로 판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땅의 것으로 보여 주려는 것이 외식이다. 하늘의 생명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십자가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들의 모든 종교 활동은 외식이다.

“금식”의 ‘네스튜오’는 ‘배고프다, 음식이 없다’라는 뜻인데 종교적으로 ‘금식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구약에서 금식은 속죄일에 하게 되어 있는데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레 16:29, 23: 27-29, 민 29:7)라고 표현하였다. 이후 사사시대에 레위인의 첩을 비류들이 윤간하고 죽이자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기 위하여 모여 금식하였고(삿 20:26), 사무엘이 미스바에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금식하며 회개하였고(삼상 7:6),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7일간 금식하였으며(삼상 31:13),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성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였다(욘 3:7).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셨을 때 금식의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셨다.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출 34:27-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모세를 대표자로 시내 산에 함께 하심을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표현하였다. 즉 모세(이스라엘)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 있음을 땅의 것을 먹고 마시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음식을 끊고 하나님을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 언약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금식이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포로기를 지나면서 금식의 횟수가 일 년에 네 번이나 하였는데(슥 8:19) 이사야 선지자는 금식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였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며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쾌락을 구하며 일꾼들을 억압하고 다투면서 싸움만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금식하는데 하나님은 돌아보지도 않으며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않았다고 항변하였을 때(사 58:3-4) 하나님께서 금식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성경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바하르’는 ‘선택하다,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즉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는 말이다(그래서 바른성경에서는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금식은 불의의 사슬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헛된 금식에 매여 사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을 허락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 61:1-3). 이 예언의 말씀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렇게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6-21)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금식은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살면서 끼니를 굶으며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의 멍에를 부수고 그 죄에서 놓임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죽음을 통해 이루셨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금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금식의 본질적인 뜻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거기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16절)라는 말씀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7절)라고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금식할 때 표시를 내지 않기 위해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면 금식하는 되는가? 앞에서 구제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 때도 이미 나누었지만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은 잘못 되었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의 ‘스퀴드로포스’는 ‘엄숙, 비참, 침울’이라는 뜻인데 누가복음 24:17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슬픈 빛”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의 성취로 풀어 주셨다. 즉 ‘진리를 알기 전의 어두운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만 매여 있으면 진리를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어두운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의 ‘아파니조’는 ‘모습을 감추다, 보이지 않게 하다, 알아보지 못하게 하다, 사라지다, 멸망하다’라는 뜻이다. 금식을 가지고 언약을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보지 못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악을 폭로하신 말씀이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라는 말씀은 “기름”, 즉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교체하여 “얼굴”, 즉 언약의 본질을 밝히 드러내 주셔야 제대로 된 금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금식”이란 한 마디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일시적으로 끊는 것을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안 먹는다’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먹을 것이 없다’(마 15:32)라는 뜻도 포함한다. 즉 먹지 않는 것과 함께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금식을 음식을 먹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한다고 율법적 행위를 자랑하였다(눅 18:12). 금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4-15)

 

이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본심이 깔려 있다. 본문을 풀어서 보자면 ‘우리는 먹을 것을 안 먹고 있는데 당신들은 먹을 것을 먹고 있느냐?’라는 자랑으로 예수님을 공격하자 예수님의 답변은 ‘혼인집의 아들들은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먹을 것을 먹는 저희들은 나중에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안 먹어도 되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금식의 본질적인 의미가 다 들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먹을 것이 있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금식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이 금식한다고 음식을 먹지 않는 그것은 율법을 먹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먹지 않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먹는다고 비난하는 죄성을 폭로하신 것이다.

혼인집의 아들들은 신랑과 한 가족이다(우리 성경에 “손님”이라고 번역하였으나 ‘휘오스’로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때이고 그분과 더불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만 생명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즉 바리새인들이 먹는 율법을 먹지 않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된 것이 참된 금식이며 그것이 곧 영생이다. 이것이 언약이 완성된 상태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먹는 물처럼 계속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갈증을 계속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주신 생명의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율법을 생명으로 삼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다(요 6:32-4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자는 이미 생명의 떡을 먹는 자이다. 먹어야 할 것을 먹으면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않게 된다. 먹어야 할 참된 양식을 알았는데 거짓 된 양식들이 눈에 들어올 수 없다. 성도는 이제 더 이상 금식이나 다른 율법적 행위를 함으로 율법을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로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8절).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라는 표현은 ‘은밀한 자 안에 계신 네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금식을 통해 보여 주신 복음 안에서 복음의 비밀을 품은 자는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이다. 이것이 성도의 일용할 양식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언약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였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202503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38.0616-18 금식에 대하여(202503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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