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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39
마태복음 6:19-24
하늘 안의 보물
금식에 대한 말씀 이후 갑자기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 말씀을 너무 많이 쉽게 들어왔고 또 쉽게 들은 말씀대로 쉽게 행동으로 옮긴다는 마음으로 노력하였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어왔던 것은 보물을 이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야 하는데 하늘에 쌓는 방법이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이 말씀으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강요하는 구절로 이용하였다. 교회에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그 돈이 하늘에 쌓이는가?
재물이 많은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재물이 많은 사람이 헌금으로 하늘에도 많이 쌓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부자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도 부자가 되고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늘나라에서 부자가 될 수 없다. 결국 이 땅에서의 부자가 하늘나라에서도 역시 부자로 살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인가? 이 땅의 질서 체계와 같은 더러운 욕망이 만연한 그런 나라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세우셨을까? 그러면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19-20절). “보물”의 ‘데사우로스’는 ‘보물상자, 금고, 곳간, 창고, 보물’이라는 뜻인데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오차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쌓아 두라”의 ‘데사우리조’는 ‘쌓아 두다, 모으다, 저장하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창고는 수장절(초막절)에 밭에서 거둔 것을 저장하는 곳이다(출 23:16, 신 16:16).
“좀”이란 ‘세스’는 ‘(옷이나 나무를 갉아 먹는) 곤충, 나방’이다. “동록”이란 ‘브로시스’는 ‘먹는 것, 음식, 양식, 먹는 행위’라는 뜻인데(요 6:27) 우리 성경에는 ‘구리에 생기는 녹’으로 번역하였다. “해하며”라는 말의 ‘아파니조’는 ‘추하게 하다, 사라지다, 멸망하다’라는 뜻이다.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은 ‘땅 위에 저장하지 말라’라는 말이고, “하늘에 쌓아 두라”라는 말은 ‘하늘 안에 저장하라’라는 말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보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잠 20:15)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보물이며 그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지식을 말하는 입이 세상과 대조되어 있으므로 이는 곧 참된 지식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 가장 귀한 보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보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다(참고 사 43:22-24).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 언약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물로 나타내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물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속에 언약의 말씀을 담아두셨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심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한 보물, 보배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보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땅에 쌓아 두는 보물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리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좀이 옷을 갉아 먹듯이 없어지고, 도둑이 도적질함으로 이 땅의 것은 그 본래적 가치가 상실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참고 사 51:8, 약 5:1-3).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2:33에 의하면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라고 하였는데 마태가 “동록”(헬, ‘브로시스’)으로 표현한 것을 누가는 “먹는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의 헬라어 ‘디아프데이로’는 ‘(마음을) 바꾸다, 파괴하다, 파멸하다, 썩다, 낡아지다’라는 뜻이다. 즉 겉 사람으로 낡아지고 썩는 것이며 멸망의 것이다(고후 4:16). 그러니까 육의 사람들에게 거두어들인 열매는 땅 위의 것이기에 썩는 것이고 멸망이지만 영의 사람들에게 거두어들인 열매는 하늘 안의 것으로 썩지 않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벧전 1:3-4).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마음이 없으니까 헌금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직역하면 ‘보물이 존재하는 그곳에 너의 마음도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즉 보물이 우리의 마음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땅의 보물이면 땅의 마음이고 하늘의 보물이면 하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담겼는가?”하는 문제이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담긴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된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절). 이 말씀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눈이 성해야 보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몸”의 ‘소마’는 진노가 담길 수도 있고 은혜가 담길 수도 있는 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담겼다면 성전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몸”을 성막(성전)으로, “등불”을 성막의 등잔대를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전의 완성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계 4:5-6)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2-23)
예수님께서 산상강론 서두에서 하늘의 복을 말씀하셨고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율법 자체를 중요시하여 지키려고 하다 보니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으로 율법을 곡해한 상태를 폭로하셨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본문은 이러한 문맥 속에 있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눈에 보이는 땅 위의 것을 의로 여기고 그 의를 전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적 행위라는 뜻이다. 죄인들은 누구나 다 율법적 행위를 자기 의로 치장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고 그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명예나 잘남을 내세우는 것에만 매달린다. 이것이 바로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의 죄악상임을 창세기에서 이미 밝혀 주었다.
창세기 3:7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하였다. 선악의 나무를 취하기 전에는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다가 선악의 나무를 취한 후에는 자기들이 벗은 것을 부끄러움으로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이 눈이 밝아져서 그렇다고 하였다. 진짜 눈이 밝아져서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어서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자기 기준의 눈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 기준, 자기 시각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3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기 기준의 선악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기에 네가 스스로 빛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 실상은 어두운 것이니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심한 것이냐’라는 의미이다. 죄인의 눈으로 보는 밝은 빛은 사실 어두움이다. 그러기에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의 ‘맘모나스’는 ‘부, 재산, 재물, 소유’라는 뜻이지만 그것 자체가 ‘신’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종을 의미한다. 뒤에 “주인”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 죄의 종, 율법의 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말씀한 것이다(롬 6:16-18).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눈이신 성령께서 은혜를 주셨기에 진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온전하게 된 눈은 땅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게 된 상태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성도는 하늘 안의 보물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는 자는 세상의 것, 땅 위의 것을 내 속에서 날마다 밀어내는 자를 말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끄신다(202504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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