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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40
마태복음 6:25-34
그의 왕국과 그의 의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두워 그 어두움으로 인하여 더욱 땅의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이 성하다는 것은 눈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늘의 빛이 비추어 눈을 밝게 하여 온전하게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이 온전하게 된 자는 이제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염려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염려”라는 말의 ‘메림나오’는 ‘분열되다, 나뉘다’라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염려하다, 걱정하다, 심사숙고하다, 어떤 것을 돌보다, 보호하다’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그러니까 염려한다는 것은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아닌 목숨과 몸이 나누어져 있기에 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하늘의 보물에 마음을 둔 하나의 마음이면 그것이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목숨을 위해 먹고 마시는 율법적 행위로 목숨을 유지하고, 몸을 위해 무화과나무 잎이라는 자기 의의 옷 입는 행위로 자신의 몸을 세우나 그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고 몸의 죄성을 더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문제를 26-27절에서 “음식”으로,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문제를 28-30절에서 “의복”으로 말씀하신다.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6-27절).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보라”라는 표현은 눈을 밝게 하신 자는 아버지께서 기르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신 말씀에서 “너희”는 산상강론의 말씀이 들려진 자들이며 곧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다. “기르시나니”의 ‘트레포’는 ‘양육하다’라는 뜻이다. “키”의 ‘헬리키아’는 ‘나이, 성숙, 성장, 수명, 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헬리키아)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니까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생물학적으로 키를 더 키울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나누어진 마음, 곧 여러 가지 문자의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장성한 상태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적 자기 의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30절).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들의 백합화”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비유한 것이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기르고 입히심이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아들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율법적 행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정결함을 상징하는 “흰 옷”(계 3:4-5, 4:4, 7:9, 13-14).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계 19:8)을 입었다고 하였고, “피 뿌린 옷” 곧 “하나님의 말씀”(계 19:13)이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흔히 본문을 가지고 ‘우리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다 입히시고 채우시며 모든 것들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일에 염려하지 말고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면 나머지 삶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니 무조건 믿고 살면 된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가? 염려하지 않는 믿음이 되는가? 교회를 수십 년 다니면 이런 믿음이 생기는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1-4)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한 달이 지나자 가져나온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다 떨어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 이스라엘의 관심사는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었던 것에 있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일용할 것을 거두게 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중에서 이스라엘을 계속 고치시며 바른 인간으로 개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증명하여 율법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실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을 개조함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모세보다 더 우월하신 분으로서 또한 왕으로서 율법의 완전함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왕국의 진정한 복을 선언하셨다. 그것이 바로 복으로 표현된 하나님 왕국이다. 당시에 가장 의롭다고 볼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써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선포하셨다.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자도 완전한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율법의 대표적인 부분 살인, 간음과 음행, 맹세, 보복과 이웃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셨고 또한 그들이 의를 드러내는 종교적인 행위가 된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하여 본질적인 뜻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것은 곧 율법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들을 포함한 율법의 모든 내용이 지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30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믿음이 분량이나 크기가 작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는 말씀이다.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참고 마 17:20, 눅 17:6).
결국 “기르시나니”(26절)의 ‘트레포’라는 표현과 “자라는가”(28절)의 ‘아욱사노’라는 표현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양육하여 진리로 든든히 세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구원에 이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을 자라는 것으로 이렇게 말씀하였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그리고 작은 결론으로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방인들”이란 “하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자들이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아시는 분은 언약 관계 안의 아버지뿐이시다.
이런 차원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서 이미 밝히신 바와 마찬가지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라고 말씀하셨다. “먼저”는 순서가 아니라 ‘오직’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게 된 자는 오직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늘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란 말씀도 오해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필요한 것들, 즉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다 채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빛을 받아 눈이 온전하게 된 자는 늘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기에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한 왕국이시며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우리 안에 계속 채우실 것이라는 뜻이다.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땅의 것으로 늘 염려하며 사는 존재가 바로 이방인이다. 하늘의 빛을 받지 못해 눈이 어두운 자는 마음이 항상 이 땅에 매여 있기 때문에 몸이 어두워 늘 육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산다. 그러나 하늘의 빛을 받은 자는 눈이 온전하여 몸이 밝아졌기에 늘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단순하게 이 땅의 재물, 돈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땅의 것에 대한 문제 전체를 재물, 돈이라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내세우는 모든 인간의 의, 율법적인 문제에 대하여 지적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잘못된 의를 계속 지적하시며 그것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제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진정한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참된 금식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성도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아 눈이 온전하게 되어 하늘의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을 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땅의 어떤 염려도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34절)라고 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내일의 구원을 향해 율법적 행위를 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상태이다. “괴로움”의 ‘카키아’는 ‘나쁨, 고통, 악’이라는 뜻이다. “그날로 족하니라”라는 것은 오늘의 악함은 오늘로 족하다. 왜냐하면 그 악함은 구원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내일의 구원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그의 왕국과 그의 의 안에서는 날마다 오늘이라는 의미이다. 성도는 오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만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202504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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