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37. 마태복음 6: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8)

불편한 진리 2025. 3. 1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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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37

마태복음 6: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8)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아 아멘 -

 

사람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이며,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언약을 십자가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비밀의 관계를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거룩(정결)하게 되어라! 당신의 그 이름이, 오라! 당신의 그 왕국이, 이루어져라! 당신의 그 뜻이, 하늘 안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넘겨달라! 다음 날의 우리의 빵을 오늘 우리에게, 탕감하라! 우리의 그 빚들을, 악으로부터 구하라! 우리를 시험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이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임을 고백하는 기도가 오늘 본문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b). 우리 성경에 이 본문은 괄호로 처리되어 있는데 각주에 보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의 원본이 없어졌기 때문에 원본에서 베낀 여러 사본들 가운데 이 본문이 없는 것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포함된 사본을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사실 이 말씀 앞에는 번역되지 않은 ‘호티’라는 접속사가 있다. 예전의 주기도문에서는 ‘대개’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왜냐하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왜냐하면 당신께 있기 때문이다! 그 왕국과 그 권세와 그 영광이 그 영원 안에 아멘!’이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기도한 내용을 하나로 모은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왕국이 임하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나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는 이것이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혀 다른 뜻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를 반복하여 말씀한 것이다. 한 마디로 기도하는 이유를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 왕국이 임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말씀한 ‘그 왕국, 그 권세, 그 영광’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고백하되 ‘영원 안에’ 있음을 간구한다. “나라”라고 표현한 ‘그 왕국’은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인데 그것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어 그 안에서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왕국이다. “권세”란 십자가로 죄를 사하시는 권세이고,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본질은 말씀이다(요 1: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 가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골로새서 말씀이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3-17)

 

성경에서 “영원”이란 끝없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어 영원 안에 있음을 간구한다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유한하며 한정적이며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는 간구이다. 이 땅의 것은 썩어질 것이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우리의 소속이 이 땅에 썩어지고 없어질 유한한 것에 매인 자가 아니라 영원한 왕국에 속한 자임을 고백하며 확인하는 자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죄인이 자기 영광을 취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착각 속에 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찬송을 열정적으로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냐 하는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취지와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 성도의 고민거리여야 하고, 교회의 관심사여야 한다. 그래서 하늘 왕국의 찬양은 이런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한다.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2-13)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전제는 인간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위한 것들만 구하는 간구가 나오는데 성경은 그것이 악을 쏟아내는 기도라고 하였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들으신다고 하셨는데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 안에서만 의인의 기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잠 5:28-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함몰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됨이 은혜요 복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맞추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언약에 도구로 부름받아 쓰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알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하는 기도란 신을 초청해 오는 식의 기도이지만 주님의 기도는 자기 백성들을 초청한 기도이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 결국 성도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 안에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구할 수가 없다. 그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라는 말은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한 다음에 우리의 욕망을 따라서 구할 것이 따로 있으면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보다 먼저’라는 의미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예수님께서 이루신 나라, 그분의 의’ 외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의 안에 있는 자가 “너희”이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말만큼 막말은 없을 것이다.

기도는 “아멘”으로 끝난다. “아멘”은 ‘진실로, 견고히’라는 뜻인데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으로 ‘아만’(지지하다, 신실하다, 확실하게 하다, 믿다), ‘에무나’(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에서 온 말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에무나)(출 17:12)

 

우리 성경에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는 말씀이 ‘에무나’인데 모세가 손을 들고 아론과 훌이 그 팔을 잡고 있었기에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신실함으로 이루셨다는 뜻이다. 결국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아멘!”이라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기도라는 의미이고 우리가 그렇게 ‘아멘!’으로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취하신 십자가에 나도 함께 죽었음을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정결)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그 왕국이 왔습니다! 당신의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니다! 하늘의 그 양식을 넘겨주셨습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시험에서 확증으로 이루어 그 악으로부터 구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본질적인 뜻이다.

그리고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말이 있는데 ‘에안 가르’라는 말인데 ‘그러면 참으로, 그렇다면 사실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도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인 이 말씀이 왜 필요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잘못”이라는 말의 ‘파랍토마’는 ‘파라’(곁에, 옆에) ‘핍토’(떨어지다, 넘어지다)의 합성어인 ‘파라핍토’(범죄하다, 잘못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죄, 범죄, 실수’라는 뜻인데 ‘하마르티아’와 동의어이다(로마서 5:12-21에서 죄에 표현을 이 두 단어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였다). “용서”의 ‘아피에미’는 ‘아포’(~에서, ~로부터)와 ‘히에미’(보내다)의 합성어로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상대방을 멀리 떠나보낸다는 것은 땅적인 자리에서 하늘의 자리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용서란 진리를 넘겨줌으로 땅적 자리에서 하늘의 자리로 떠나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조건이 아니다. 성도는 이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동참되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시험을 통해 악에서 구하여주심의 은혜를 입어 확증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자들을 함께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넘겨주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죄에서 떠나 영생의 자리에 이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 후 제자들에게 증인의 역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19-23)

 

(202503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37.060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8)(202503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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