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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34
마태복음 6: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5)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하늘 안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함으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을 확인하게 하시는 기도이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의 뜻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항상 거스르며 원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드러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렇게 이루셨다는 하나님의 언약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네 번째 기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0절)라는 간구를 살펴보게 되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기도문을 구분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흔히 전반부의 세 기원, 즉 첫째 기원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에서 셋째 기원인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기원’(하나님 중심의 기도)이고, 후반부의 세 기원, 즉 넷째 기원인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것에서 여섯째 기원인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까지가 ‘우리에 대한 기원’(인간 중심의 기도)으로 구분하여 생각한다.
전반부 세 기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원이고 후반부 세 기원은 우리의 실제적 삶에 대한 기원으로 생각한다면 심각한 성경적 오류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이 기도를 우리의 생활을 위한 간구라고 본다면 같은 산상수훈의 내용 중에서 하신 말씀과도 상충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1-34)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일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다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으로 우선되는 것, 으뜸이 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오히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표면적인 이해이고 인간 중심적인 성경해석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0절)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 다음날의 우리의 그 빵을 넘겨달라! 오늘 우리에게’라는 말이다. 이 말씀 역시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언약의 말씀이다. “오늘”이라는 말의 ‘세메론’은 ‘오늘’이라는 뜻인데 70인역에서 ‘하이욤’(오늘 그날에)의 역어로 사용된 단어이다. 즉 오늘은 ‘그날’로 하나님의 날을 표현한 것으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신 종말을 의미한다.
성도는 시간적 개념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하늘의 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땅적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늘들이 되어 사는 날이 그날이고 종말의 상태에 있는 것이 오늘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 역시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가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에피우시오스’인데 ‘에피우사’(잇달아 일어나는, 이튿날)에서 유래하여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매일 필요한’이라는 뜻을 지닌다. 오늘과 오늘이 잇달아 이어지는 날이니 문자적으로는 이튿날, 곧 내일이다. 그래서 내일에 필요한 양식이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이 말씀은 출애굽 때 만나를 주신 것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이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 16:4-5)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라는 것을 하늘에서 내리셨는데 매일매일 하루의 분량만 거두도록 하셨다(출 16:15-18). 그리고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으며(출 16:19-20), 육일에는 두배로 거둘 수 있도록 하셨는데(출 16:22-27) 곧 내일의 양식을 거두는 것이었다. 육일에서 내일은 안식일이다. 그러니까 갑절의 양식이요 내일의 양식은 안식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에 들어간 자들만이 먹는 은혜의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는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매일의 양식이었지만 사실은 사람이 먹는 매일의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그 먹이시는 주체가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즉 그들은 매일의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먹고 사는 것이 하늘에서 은혜로 주어지는 안식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라는 것을 주어서 매일 먹고 살게 하시지만 만나로 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매일 만나를 내리고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먹을 것으로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살아갈 수 있는 원인은 만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라는 표현은 ‘매일의 말씀을 날마다 거둘 것이다’라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4:3-4). 그 의미는 단순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것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떡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가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자신의 양식임을 밝히신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요한 사도는 이 땅에 예수님의 오심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라 했고(요 1:1) 곧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선언했다(요 1:14). 결국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약의 실체이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안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에게는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마 6:8).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다(마 6:31-32). 이방인들의 관심사는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에만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간구할 때 매일매일 먹는 양식을 목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48-51, 53-58)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배척을 받아 치워 버려진 떡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떡을 들어 올리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취하신 떡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이 떡을 취할 수가 없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먹을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에 있음을 확인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의 의미는 비록 이 땅에서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는 죽음이 없다면 생명과는 상관이 없음을 확인하는 간구이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로 이루신 그 양식 넘겨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자들이 교회요 성도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성도의 삶은 일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삶이어야 하고 또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생존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간구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양식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아니 주께서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목적은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생명의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죽음 안의 기도가 아니라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에 불과하다(202501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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