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29. 마태복음 6:5-8 기도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24. 11. 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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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9

마태복음 6:5-8

기도에 대하여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라고 말씀하시고 율법의 본질을 밝히심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계시하셨다. 유대인들의 경건 3종 세트는 구제와 기도, 금식이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의한 잘못된 기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지적하셨다. 한 마디로 ‘외식하는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대표적인 기도의 모습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절). “기도”의 ‘프로슈코마이’는 ‘프로스’(~을 향하여)와 ‘유코마이’(소원, 원함)의 합성어로 ‘기도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인데 히브리어 ‘팔랄’(기도하다, 중재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 원하는 것은 그저 땅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하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롬 8:2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향해 원하시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원하심이 나의 원함이 될 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란 원초적으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내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외식하는 기도’란 어떤 것인가? 본문에서 외식하는 자들은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 기도의 자세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참고 눅 18:11). 왜냐하면 성소에서 제사장이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동안 밖에서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기 때문이다(눅 1:21). 따라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외식하는 기도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하심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이 원하는 것을 기도로 보여주려는 것이 외식이다. 하나님의 기도를 사람의 기도로 보여주니 외식이라고 한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고(단 6:10),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개인적으로 최소한 하루 세 번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였다(행 3:1, 10:1-3, 9). 그것을 경건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성전을 기도하는 집(사 56:7, 마 21:13)으로 인식하였기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큰 거리의 모퉁이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였다는 것은 성전으로 가다가 늦어 사람들이 잘 보이는 큰 거리에서 기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할 목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기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말의 ‘아페코’는 ‘받다, 멀리하다, 억제하다, 떨어져 있다, 멀다’라는 뜻으로 이미 받았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즉 자기 품삯을 이미 받았다는 것은 곧 본래의 상, 하늘의 상이라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기도할 때”의 ‘프로슈코마이’가 문법적으로 ‘중수디포넌트’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디포태’란 형태는 중간태나 수동태이면서 의미는 능동태인 동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하는 어떤 힘에 의해(수동) 행동하게 되는 것으로 행위의 결과에 기도하는 주체가 영향을 받는 것(능동)’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힘에 이끌려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골방”이란 ‘타메이온’은 ‘곳간, 창고, 내실, 밀실’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첼라’(갈빗대, 옆구리, 측면) 혹은 ‘리쉬카’(방, 침실)의 역어이다.

“들어가”라는 말의 ‘에이셀코마이’는 과거 명령법으로 ‘이미 골방에 들어간 상태’라는 의미이다. 정리하자면 ‘네가 기도하게 되어질 때 너의 상태는 골방에 들어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골방에 있는 것이고 골방에 들어가 있는 상태는 기도하는 상태라는 뜻이다. “문을 닫고”라고 하였는데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7:13, 요 10:7).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분된 문 안의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골방이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결된 다락에 딸린 방이 골방이며(왕상 6:5), 희생 제사의 제물들을 두고 제사장이 제물을 먹을 수 있는 거룩한 곳이다(느 10:33-39, 겔 42:13). 즉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 딸린 방에 연결된 작은 방이 골방이라면 정작 가장 중요한 골방은 성소에서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라고 할 수 있다. 지성소는 희생 제사의 총체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언약의 자리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지성소 가장 가까이 두는 분향단의 향이 성도의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계 5:8).

결국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지성소가 보여주는 언약 안에서 희생 제물을 담고 있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갚으시리라”라는 말의 ‘아포디도미’는 ‘넘겨주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이루려고 하는 율법적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차단된 비밀스러운 방, 곧 지성소에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그 아버지로부터 언약의 완성이라는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기도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 “중언부언”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한다는 뜻인데 앞에 “이방인과 같이”라고 하였고 뒤에 이 말씀을 풀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즉 이방인들은 막연한 종교심으로 자기의 신에게 정성을 드리기 위하여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참고 왕상 18:26-28). 이것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을 감동시키기 위한 인간들의 기도이다. 잠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8-29)

 

예수님께서는 5-8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라고 하셨고 9-15절에서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행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율법을 주실 때에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으로 주셨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이 경험했던 것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기에 애굽 땅과 관련된 것이며 하라는 것은 그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언약의 땅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들이 보고 경험하였던 애굽적인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언약의 땅에서 하라는 계명으로 나아가야 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안식의 땅으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소위 말하는 십계명인데 이는 단순히 계명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하는 기도, 즉 이렇게 하지 말라는 기도에서 벗어나 이렇게 기도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기도는 죄인들이 하는 기도이다. 죄인은 그 입을 통해 악을 쏟아 놓을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기도만 들으신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인가? 이 땅에 의인은 없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다(롬 3:10-12).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실패이다. 그것이 죄인의 실상이다.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의인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외에는 다 거부된다.

죄인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믿음으로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 의를 덧입힌 결과이지 나의 의나 공로가 아니다. 그분의 의로 인하여 우리에게 부르짖음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 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아들로 삼으셨고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신다고 말씀한다. 기도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안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3-25)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생각하게 된 경위가 고통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르짖었기에 언약을 기억하셔서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인간들이 부르짖어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언약 백성들이 이방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공격을 당하여 (언약 안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셔서 비언약적인 것들을 척결하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야만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측면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형성 과정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을 확정하실 때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 6:9-10)

 

이때 기도한 자들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통과 죽임을 당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의 기도만 들으신다는 뜻이다. 죄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살해당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34, 히 8:25).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뜻이다(요 14:13-14). 내 기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 주님의 뜻만 이루어진다는 고백이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그러므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어야 한다(참고 요 10:25, 16:23).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하나님께 떼쓰거나 농성을 하는 강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신 언약 안에서 진리를 넘겨주시고 그 진리를 넘겨받는 비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기도이다(202411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29.0605-08 기도에 대하여(202411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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