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26. 마태복음 5:38-42 보복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24. 10. 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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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6

마태복음 5:38-42

보복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기 입장에서 필요한 것만 보고 취한다.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본문을 대하면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으로 느낄 때 우리는 성경 본문에 밑줄을 치거나 형광색으로 마킹을 한다. 그러다보니 다음에 또 그 본문을 대하면 밑줄을 그은 부분만 눈에 먼저 들어오기에 이전에 이해했던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 본문 역시 나를 해하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하게 대하며 조금의 도움이라도 구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밝히신 것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살인, 간음과 이혼, 맹세에 대한 말씀은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절). 율법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레 24:17-22, 신 19:15-21).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2-25)

 

문자적으로만 보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게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하는 말씀처럼 보인다. 실제 당시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으로 유대인들은 악에는 반드시 악으로 맞서야 하는 뜻으로 피해를 입은 자는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보복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출애굽기 본문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복수를 막기 위한 조치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보응이나 처벌은 사적으로 시행하는 보복이 아니라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이루어지는 법적 절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으로 보복을 하게 되면 피해를 입은 정도를 지나쳐서 과도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에 법의 테두리 내에서 공정하게 처벌하여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율법의 말씀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재판장이 가해자를 처벌할 때 사적인 감정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재판장이나 법적 기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와 기관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따라서 재판을 대행하는 것뿐이므로 실제적으로 법을 어긴 자의 행동을 판단하고 처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신 1:17).

인간이 직접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재판장이 되겠다는 뜻이고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서 가해자를 처벌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친히 하나님이 되어 심판을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붙잡아 자기 행위로 지켜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은 보는 것과 먹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의 나무를 선악의 지식 나무와 생명나무를 하나로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의 나무로 보고 먹어 자기의 눈이 생겼고 자기 이가 생겼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6-7)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6)

 

하나님의 눈에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으나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그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율법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눈에 눈, 이에는 이에 대한 말씀은 죄인의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는 상태, 이는 생명의 양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존재임을 폭로한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39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악한 자”란 말의 ‘포네로스’는 ‘병든, 나쁜, 악한, 사악한, 가련한, 무력한, 비참한, 초라한, 매력없는’이라는 뜻이다. “대적하지 말라”의 ‘안디스테미’는 ‘안티’(~에 반대하다)와 ‘히스테미’(서다, 세우다)의 합성어로 ‘똑바로 서는 것을 거부한다’라는 뜻이다. 인간은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선악 체계 속에서 하나님도 자기 기준의 선악으로 구분하는 존재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악한 자”란 곧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기를 거부하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로 세워지기를 거부하고 율법적 행위를 고수하여 자기 행위로 의를 쌓는 자가 악한 자로서 ‘나’이고 ‘우리’이다.

“오른편”이란 말의 ‘덱시오스’는 ‘옳은, 바른, 선, 오른쪽’이라는 뜻으로 신적 능력을 상징한다(시 18:35, 118:15). “뺨”의 ‘시아곤’은 ‘뺨, 얼굴, 볼, 턱, 턱뼈’라는 뜻이고, “치거든”은 ‘라피조’인데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치다, 때리다’라는 뜻이다. “왼편”이라고 번역한 말은 ‘알로스’로 ‘다른’이라는 뜻이다(헬라어 성경에는 “왼편”이라는 말이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다른 이’라는 말이다). “돌려대며”라는 말의 ‘스트레포’는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너희가 진리로 세워지기를 거부하고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내세움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치고 바꾸어 다른 이까지 때리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마 26:67)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1-4)

 

“다른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쌓는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치고 공격한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고발하여”라는 말은 ‘델로 크리노’인데 ‘델로’는 ‘~로 규정하다, 결정짓다, 원하다’라는 뜻이고, ‘크리노’는 ‘정죄하다, 심판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속옷”의 ‘키톤’은 ‘옷, 의복,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케토네트’(덮개, 옷, 겉옷, 세마포)의 역어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속옷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겉옷”이라는 말의 ‘히마티온’은 ‘옷, 겉옷, 의복, 세마포’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그리고 너를 율법으로 판단하여 너를 그런 사람인 줄로 결정한 어떤 사람이 옷을 달라고 한다면 다른 옷까지도 같이 주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케토네트’는 하나님께서 덮어 주시는 은혜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비유하였다. 즉 상대방을 계명으로 이해하고 행위로 지키는 자로 판단하고 옷을 달라고 한다면 당신이 지키는 율법의 의를 보여달라는 의미이고 그렇게 율법적 행위를 요구하는 자에게 율법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계시하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함께 넘겨주라는 의미이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히마티온)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또 그가 피 뿌린 옷(히마티온)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1절). “억지로”라는 말의 ‘앙가류오’는 ‘강요하다, 억지로 시키다’라는 뜻이고, “오 리”는 ‘밀리온 헤이스’인데 로마시대에서 ‘밀리온’은 ‘천’이라는 뜻이며, ‘헤이스’는 ‘하나’라는 뜻이다. “십 리”라고 번역된 말도 헬라어로는 ‘뒤오’인데 ‘둘, 짝’이라는 뜻이다. “동행하고”의 ‘휘파고’는 ‘휘포’(~아래)와 ‘아고’(인도하다, 데려오다, 끌어오다)의 합성어로 ‘~아래로 데리고 오다, ~아래로 인도하다, 떠나가다, 가다’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수비대가 식민지 백성들에게 강제로 길 안내자나 물건의 운반자로 강제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른성경과 가톨릭성경은 이 구절을 “또 누가 네게 강제로 천 걸음을 가자고 하거든, 그와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 번역에서도 “걸음”이라는 말을 의역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천이 하나인 줄로 알고 그걸 달라고 한다면 둘로, 혹은 짝으로 함께 끌고 가라’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하나를 강요한다면 진리와 함께 둘로 넘겨주라는 것이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절). “구하는”이라는 말은 ‘아이테오’는 당연히 주어야 할 것, 약속한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마 7:11)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온전히 성취하신 그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에게 요구하는 그 사람에게 넘겨주되 받은 대로 넘겨주고 다른 것으로 차용해서 주지 말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요구하는 자에게 율법을 가르쳐주되 그 율법의 말씀대로 넘겨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다른 것으로 왜곡해서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이 없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다. 바르게 의롭게 살기 싫어서 율법을 악용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죄성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하게 만든다. 선악의 기준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마귀가 악을 향해서 달려가도록 죄인들을 주장한 결과이다. 그래서 율법을 계명으로 가르치고 배우며 자기 행위로 의를 이루어 영생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고 다른 것으로 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들 역시 이런 모습이다.

우리는 이러한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외부에서 건져내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들을 십자가로 친히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최고의 율법은 십자가이다. 그것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차원의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을 보게 되는 것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을 십자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에 십자가는 최고의 율법이 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발하며 동시에 하나님만 구속을 이루실 수 있다는 가장 분명한 상징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믿음에 이끌려 가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께서 다 이루신 것 안에서 우리가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202410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26.0538-42 보복에 대하여(202410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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