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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4
창세기 35:1-15
벧엘의 이스라엘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의 과격한 행위를 꾸짖었다. 가나안 족속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 주위 환경을 세겜에 거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 거기다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직접 계시의 말씀도 주셨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갈 준비를 하면서 왜 집안 모든 사람에게 우상을 버리라고 명령하나? 라반의 집에서 나온 직후에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언약을 온전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이전의 야곱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얍복나루터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었고, 이제 디나가 강간당하는 일을 통해 세겜 성 사람들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 밧단아람으로 갈 때에 만난 하나님 그분만이 전능한 하나님이요 참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방 신은 우상일 뿐이며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과거에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자신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으로 새롭게 깨닫고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버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1절). 가나안 땅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벧엘로 올라가게 된 것은 야곱의 서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언약”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야곱에게 상기 시켜주시기 위해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이라고 밝히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제단”이란 ‘미즈베아흐’는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끄실 때 제단을 쌓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기 죽음 안에서 아브라함 역시 죽어야 할 존재임을 나타내신 것처럼(12:8, 13:4, 13:18)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일하셨고(26:25) 또한 야곱에게도 자기 언약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일하신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절). “너희 중에 있는”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타웨크’는 ‘중앙, 한 가운데, 함께, 이등분’라는 뜻으로 너희의 한 가운데 차지하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바알이었고 아스다롯이었다(삿 10:6, 삼상 12:10). 언약의 말씀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바꾸면 하나님은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라고 하였는데 단순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아니다. 출애굽 당시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이 의복을 바꿔 입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신 것이 가죽옷을 입히신 것이다(3: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출 19:10)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의 옷은 자기 행위에서 나온 것이기에 율법의 옷이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옷은 이제까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겠다고 설치고 나댔던 율법의 옷이다. 그 율법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벧엘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옷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3-4절). “상수리나무”(히, ‘하엘라’)에 정관사 ‘하’가 붙어 어떤 것을 지칭함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셨던 그 상수리나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 12:6)
상수리나무를 표현할 때 “모레”라는 말을 붙였는데 ‘교사, 스승(사 30:20), 가르침, 지시하는 자, 이른 비(욜 2:23, 시 84:6), 교훈(욥 36:22)’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는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는 곳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나타내셨다(18:1, 삿 6:11, 수 24:26, 참고 호 4:12-13). 그래서 “숙곳”과 “세겜”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잘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의 장소로 이미 우리는 생각했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이 우상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 묻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을 상징한다.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5-7절).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기 언약대로(28:13-15) 야곱을 벧엘로 돌아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진행해 오시는 동안 야곱이 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아왔고, 숙곳과 세겜에 머물러 그곳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정착하며 오랫동안 살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일에 인간의 행위는 결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도리어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것이 우리의 율법적 행위이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라는 말은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기 죽음을 확인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제 “엘벧엘”이라 고백하였는데 ‘벧엘의 하나님’을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엘’이란 명칭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리브가를 따라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왔었고(24:59),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날 때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에게 딸려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야곱은 홀로 혈혈단신으로 하란 땅에 간 것이 아니라 드보라와 함께 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종들과도 함께 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드보라”의 히브리어 ‘데보라’는 ‘다바르’(말하다, 약속하다, 정돈하다, 선언하다)에서 온 말이다.
사사 드보라는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삿 4:5)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이스라엘 자손의 재판을 담당하였다(삿 4:4-5). 드보라는 군사적 성격을 띠지 않은 사사로서 명성을 얻으며, 후에 사람들은 여호와에 대한 충성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 되게 한 유능한 사람으로 기억하였다. 드보라는 발락을 세워 시스라를 패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족속의 왕 야빈의 학대에서 구원하였다(삿 5장). 당시의 사람들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삿 5:7)존경하였다.
사사기에서도 드보라의 역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한 것처럼 드보라는 야곱에게 말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의 말씀으로 야곱을 이끌고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드보라와 동행하게 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드보라의 죽음을 언급한 이유는 야곱이 이제 말씀의 젖을 떼고 겉사람이 죽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완전히 하나 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알론바굿”(히, ‘알론바쿠트’ : 통곡의 상수리나무)이라고 하였다. 겉사람이 죽고 속사람, 곧 영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 죽음이 동반되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통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겉사람에게 십자가는 통회와 자복의 눈물이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9-10절). 야곱은 32장에서 이미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라고 언급한 것은 야곱이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세겜까지 이른 것은 실제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언약의 자리까지 온전히 돌아온 것은 젖을 떼고 온전히 말씀에 함몰될 때이다. 이런 점에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얍복 나루터에서 하신 말씀이지만(32:28)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언약 안에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확인하신다는 차원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언약의 이름 이스라엘을 상대하시며 이스라엘로 살게 하실 것이다.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11-13절).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이 말씀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며 주신 말씀과 같다는 사실은 바로 야곱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상속자라는 것을 확인시키셨다. 그리고 진리로 이 땅을 충만하게 하실 분이 야곱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루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약속의 땅, 영적 가나안인 하나님 왕국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합류시켜 이끌어가신다는 보장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14-15절). 야곱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언약이고, 그 언약은 돌기둥으로 세워진 성전으로 고백한다. 이는 곧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을 말씀이 성취하셨다는 고백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의 열심으로 이루신 것이다(202411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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