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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2
창세기 34:1-17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일
야곱이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33:17)다고 말씀함으로 아직 언약의 땅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하란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후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대로 애굽의 라암셋에서 벗어나 머물렀던 다른 장소의 같은 이름 “숙곳”(출 12:37)이라 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끌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야곱은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주하지만 그곳은 임시 거처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약대로 벧엘로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33:18)라고 하였다. 직역하면 ‘그리고 들어갔다. 야곱은 평안한 성 세켐으로’라는 말이다. 야곱의 생애에 “평안히”라는 표현이 여기 처음 등장하는데 현실적으로 야곱의 생애는 가나안 땅을 떠나 밧단아람을 거쳐 세겜으로 오기까지 20년이 평안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에게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언약 안에 제대로 끌려왔기에 평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33:19)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대로 야곱을 벧엘로 이끌어 가셔야 하고 야곱은 세겜의 땅을 사서 정착하고자 한다.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길은 언제나 충돌된다. 내가 원하는 길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나 결국은 성령께서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우리 안에 십자가 은혜만 남기신다.
야곱은 희생 제사를 통해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단순히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며 이끌어 가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34장 사건이다.
“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1-2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라고 하였다. “디나”(공의, 심판)에 대한 기록은 30:21에 처음 나오는데 레아가 스불론을 낳은 후 “그(녀)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 야곱에게는 딸이 디나 외에도 다른 “딸들”이 있었으나 세겜 사건을 보여주시기 위해 언급되었다(34:21, 46:7).
스불론은 야곱의 열 번째 아들이다. 그리고 라헬에게서 요셉이 태어난 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계시가 주어졌다. 그리고 라반과 품삯을 정한 후 6년을 일했으니 디나는 하란 생활 14년 정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고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5-7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야곱이 세겜에 거주한 것이 적어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라고 말씀한다.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디다는 아들들을 보러 나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딸들을 보러 나갔다고 하였으니 디나는 언약의 아들 야곱 집안의 사람이 되어 남자가 된 것이다. 교회가 땅적 존재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1-4)
그러므로 땅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취한다는 것은 교회가 음녀가 되는 것이다.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1-3)
“강간하고”의 ‘샤카브’는 ‘(성관계를 위해) 눕다, 거하다, 휴식하다’라는 뜻이고 “욕되게 하고”라는 말의 ‘아나’는 ‘(강제로) ~하기에 바쁘다, 괴롭히다, 천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땅적 존재가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를 강제로 취하여 그것을 안식이라고 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가 줄 수 있는 안식은 없다.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3-4절). 본문의 흐름을 보면 세겜은 순간적인 욕정으로 인해 디나를 강간한 것 같지는 않다. 디나는 딸들을 보러 나갔으나 실제로는 세겜이 디나를 보고 있다가 취하였다. 그는 야곱의 가족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디나를 눈여겨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세겜은 먼저 디나를 강간함으로 이미 일을 저질러 버린다. 그리고는 디나와 결혼하기 원하여 그 아비 하몰이 야곱을 찾아와 서로의 통혼을 제의한다. 그런데 후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없다.
28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29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신 22:28-29)
이 율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혼전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면 남자가 무조건 그 여자를 책임지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율법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빙폐물을 자신의 죽음으로 넘겨주심으로 아내로 삼으시는 구원을 계시한 것이다.
야곱에서 보자면 어차피 세겜에서 정착하려고 땅을 샀기에 하몰의 이 제안은 대단히 끌리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야곱에게 그 땅의 막강한 세력을 가진 히위 족속 집안과 혈통 관계를 맺고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세겜의 집안은 본토인으로 상당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족속이었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과 같은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당할 위험에서 든든한 우군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개인과 개인 간의 결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족속 대 족속, 민족 대 민족의 교류이고 연합이다.
“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8-10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라고 하였는데 “머물러”라는 말의 ‘야샤브’는 ‘거주하다, 앉다, 살다, 정착하다’라는 뜻이고, “매매하며”라는 말의 ‘사하르’는 ‘두루다니다, 장사하다, 무역에 종사하다’라는 뜻이고, “기업을 얻으라”라는 말의 ‘아하즈’는 ‘붙잡다, 취하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즉 히위 족속과 통혼함으로 연합하자는 것이었다.
“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5-7절).
야곱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니 그 땅의 원주민인 히위 족속이 두려웠을까? 레아의 소생이 아니라 라헬의 소생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무튼 야곱은 아들들이 들에서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다. 아들들은 디나가 당한 일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7절)이라고 분노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으로는 처음 언급되었는데 실로 세겜의 범죄는 단순히 야곱의 집안에 디나라는 한 개인에게 행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범죄로 야곱의 아들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의 ‘네발라’는 ‘어리석음, 무분별함, 치욕’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이다(시 14:1, 53:1).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11-12절). 세겜은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라고 말하였고, 또한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속내는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23절)라는 것이었다. 히위 족속이 제안하는 통혼의 목적은 야곱의 모든 소유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13-14절).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야곱은 잠잠하였고 아들들이 “할례”를 제안하였는데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라고 밝히고 있다. 즉 거짓된 진리를 전하였다는 뜻이다. 할례를 종교적으로 이용한다. 아들들은 진리가 아닌 말을 하게 된 것은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라고 말씀하는데 사실은 “우리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수치”란 말의 ‘헤르파’는 ‘비난, 조롱, 치욕, 조소’라는 뜻인데 자신들의 수치로 여겼다는 것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야곱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자손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들은 아직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수치로 여겼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디나 사건을 통해 아들들이 언약을 알지 못하고 언약의 표적인 할례를 이용하는 종교성만 가득한 이스라엘의 부끄러움, 수치를 드러내고 계신다. 야곱에게 주신 언약은 벧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15-17절). 야곱에게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이 주겠다고 언약하셨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세겜 성의 추장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있었고 그 언약을 좇아가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히위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된 자들이다(창 15:16-21).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8-12)
결국 언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끄러움, 죄악을 드러내심으로 “디나”라는 이름의 뜻대로 심판과 공의를 나타내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세겜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자기 언약의 자리 벧엘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02410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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