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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3
디모데전서 1:12-20
우리 주의 은혜
디모데전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한다면 교회를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된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목회자들이든 교인들이든 교회가 있음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고 그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고 교회의 건물, 조직, 그 조직을 위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는 기준으로 삼고 정작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건물 교회가 부각되어 십자가를 가리는 결과로 나아간다. 이런 모습이 “십자가의 원수”(빌 3:18)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1:1)을 따라 사도가 된 입장에서 “다른 교훈”(1:3)을 경계하고 “바른 교훈”(1:10)인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1:11)에 대한 것을 전하였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왜냐하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능하게 하신”이란 말의 헬라어 ‘엔뒤나모오’는 ‘엔’(~안에, ~와 함께)과 ‘뒤나모오’(강하게 하다, 강화하다, 할 수 있다)의 합성어로 ‘(어떤 것 안에서)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고 강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감사함은”(헬, ‘카리스 에코’)이란 말의 ‘카리스’는 ‘은혜, 선물, 자비, 감사, 호의,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헨’ 혹은 ‘헤세드’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 창세기 6:8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히, ‘헨’)를 입었더라”라고 번역하였다.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으로 현재형을 사용하여 지금 계속 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리고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호티’(왜냐하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즉 바울 사도에게 직무를 주신 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충성”은 ‘피스토스’로 바울 자신을 믿음이 되게 하신 은혜를 고백한 표현이다. “여겨”라는 말의 ‘헤게오마이’는 ‘이끌다, 인도하다, 지도하다, 생각하다, ~로 간주하다’라는 뜻이다.
“직분”이란 말은 ‘디아코니아’인데 ‘종, 고용인,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식사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디아코노스’에서 온 말로 ‘(종으로서) 시중, 봉사, 직무, 관리,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모든 일을 ‘디아코니아’로 표현하였다(참고 엡 4:12). “맡기심이니”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티데미’는 ‘놓다, 두다, 지정하다, 배치하다, 진열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 왕국에 제대로 배치되고 진열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대로 세워진 상태라는 것이다(마 22:44, 롬 4:17, 히 1:2).
그래서 직역하면 ‘내가 은혜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나를 믿음으로 이끌어 종의 직무로 세우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11절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하자면 바울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아래 있게 하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왜 하늘의 능력을 부여하셨는가 하면 믿음으로 이끌어 종의 직무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7)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왜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 다 풀어서 설명드리느냐 하면 이 구절에 대해 한국교회는 단순하게 교회의 조직을 구성한다는 차원에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직분을 맡기셨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에게 은혜를 입히신 것은 종의 직무를 맡기시기 위함이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이끌어 복음 아래 있음을 확인시키시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우리가 어떤 직분으로 어떻게 충성 봉사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어디에 들어 있는가? 결코 없다. 믿음으로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아래 잘 배열하고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왜냐하면)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절). “비방자”란 ‘블라스페모스’는 ‘중상자, 훼방자, 모독하는 자’라는 뜻으로 욕하고 조롱함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9:3, 26:65, 막 15:29에서 “신성모독”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한 것을 같은 의미의 ‘블라스페메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박해자”란 ‘디옥테스’로 ‘박해자, 핍박자’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 “폭행자”란 ‘휘브리스테스’는 ‘휘브리조’(학대하다, 모욕하다)에서 온 말로 ‘난폭한 자, 오만한 자’라는 뜻이다. 9-10절에서 의인과 대조하여 말한 것과 같이 세 번 반복하여 완벽한 죄인이라는 의미로 강조한 것이다.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행 22:4-5, 19-20)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하셨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라고 밝히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예수의 이름을 대적”(행 16:9)하는 것이라 하였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고전 15:9)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율법의 잘못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였다는 것이다(빌 3:6).
“(왜냐하면)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는 말은 직역하면 ‘내가 믿음 아닌 것 안에 있을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믿음이 아닌 상태에서 알지 못하고 행한 자기 정당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긍휼을 입은”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런 무지하고 악한 죄인에게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았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이었다. 은혜를 입고 보니 자신의 모든 지식과 행위가 아는 것도 아니었고 믿음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도무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는 존재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4-15절)라고 고백한다. “우리 주의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단순히 자신에게만 주어진 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 즉 디모데를 통해 이 서신을 받는 믿음 안에서 진리가 된 아들들과 누리는 같은 은혜 안에 있는 우리이다. “은혜”와 “믿음”과 “사랑”은 동의어이다.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이고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깨닫게 되니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고, 자격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면 할수록 주의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는 고백이 나온다. “괴수”란 말의 ‘프로토스’는 ‘첫째의, 최고의, 최상의, 먼저, 주요한’이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의 서신중에서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의 순서로 마지막에 쓴 것이다. 그의 생애 말년에 더 깊이 느끼는 것은 주의 은혜로 인한 자신의 죄인 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단순히 나의 구원이 목적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마 1:21, 막 2:17). “받을”이라는 말의 ‘아포도케’는 ‘시인, 찬성’이라는 뜻이고 “만한”의 ‘악시오스’는 ‘가치 있는, 합당한, 훌륭한’이라는 뜻으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가장 가치 있고 합당한 신실한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보이사”라는 말의 헬라어 ‘엔데이크뉘미’는 ‘보이다, 나타내다, 증명하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율법을 지식으로 행한 죄인 중의 최고 우두머리인 자신과 같은 자에게 긍휼이 입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주어진 은혜임을 영생을 향한 자들에게 증명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나기까지 참으셨다는 의미이다.
율법을 행하는 자기 의가 완전히 무너졌기에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절)이라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는 진리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주어진 은혜는 영원하신 왕 안에서 세상의 것과 대조된 것으로 썩지 않고 보이지 않고 완전한 하나의 진리이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18-19절). “너를 지도한”이라는 표현의 ‘프로아고’는 ‘앞서가다, 먼저 가다, 앞으로 인도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막 10:32, 마 26:32 등). 바울 사도가 앞서간 그것은 복음이다. 따라서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4:14에서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이다.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은혜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선한 싸움”이란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이고 교회요 성도는 그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착한 양심”이라는 말은 1:5에서 “선한 양심”으로 번역한 표현과 같은 단어 ‘아가도스’(선한)이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는 말은 믿음에 대해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려고 하는 믿음은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0절). “알렉산더”가 에베소의 인물과 같은 사람인지 알 수는 없다(행 19:33). 중요한 것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다른 교훈을 가르친 거짓 선생이라는 것이다(딤후 2:17-18).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탄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여 교회 공동체에 분리되도록 하였다는 의미이다(참고 고전 5:5).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말하게 되니 죄인 중의 최고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우리 주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긍휼과 주의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이다(202410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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