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디모데전후서

02. 디모데전서 1:3-11 다른 교훈과 바른 교훈

불편한 진리 2024. 9. 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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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2

디모데전서 1:3-11

다른 교훈과 바른 교훈

 

바울은 로마에서 2년 동안 옥에 갇혔다가 잠시 석방되었을 때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까지 왔었지만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계속 동행하지 못하고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에베소교회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풍요의 신으로 상징되는 아데미(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어 신상 모형 장사가 성행하였던 곳이었고(행 19:21-35), 영지주의자들이 거짓 선생이 되어 율법을 왜곡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몰두하면서 가르치는 자들이 많았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3절). “다른 교훈”이란 ‘헤테로디다스칼레오’는 ‘헤테로스’(다른)와 ‘디다스칼로스’(교사)의 합성어로 ‘다른 교리를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헬라어에서 ‘다르다’라는 표현이 두 가지 있는데 ‘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 다르다는 의미이고,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그 종류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3년이나 밤낮 눈물로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 이렇게 고별 강론하였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9-31)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항상 경계하면서 이 강론을 하였는데 거짓 교사들은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그러진”의 ‘디아스트레포’는 ‘비틀다, 왜곡하다, 혼란하게 하다, 유혹하다,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다’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7:17에서는 “패역한”(세대)이라고 번역하였고, 빌립보서 2:15에서는 “거스르는”(세대), 사도행전 13:10에서는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이라고 번역하였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가르치는 자기 자신을 따르게 유혹한다는 의미이다.

사도는 구체적으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4절)라고 밝혀준다. “신화”는 헬라어로 ‘뮈도스’인데 ‘이야기, 신화, 우화’라는 뜻이다. 신화란 어떤 사건을 신비화하고 신격화하여 사람의 능력이나 공로로 포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4:7에서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고 하였다(참고 딤후 4:4. 딛 1:14).

“족보”란 조상의 위대한 인물과 자기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끝없는 족보”란 족보가 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취함이 없는 족보’라는 뜻이다. ‘아페란토스’는 ‘페라이노’(통과하다, 끝내다, 완성하다, 성취하다)에 부정접두사 ‘아’가 붙은 단어이다. 인간의 족보는 육체에서 육체로 이어질 뿐이기에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세기에는 ‘열 개의 톨레도트’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준다. ‘톨레도트’는 ‘계보, 후예, 족보, 일, 내력, 역사’라는 뜻으로 톨레도트의 두 가지 면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는 계열을 간단하게 족보로 처리하고, 언약을 이어갈 계열을 새로운 역사로 나타내신다는 차원에서 죽음의 인간 족보를 온전히 성취하는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오직 ‘한 후손’을 향한 것이었기에 언제나 단수로 표현하였다(갈 3:16).

성경에서 말씀하는 톨레도트의 마지막(새로운 역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히 성취하심을 말씀한다(마 1:1). 그러나 유대인들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마 3:9)이라고 여기며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진정한 한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족보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을 때 ‘몰두하다’라는 말의 ‘프로세코’는 ‘프로스’(~에서부터, ~을 향하여)와 ‘에코’(가지다, 소유하다)의 합성어로 ‘주의하다, 전념하다, ~을 향해 마음을 쏟다, ~을 붙잡다, ~에 빠지다, ~을 탐닉하다, ~에 생각과 노력을 쏟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며 족보를 향해서만 마음을 쏟았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도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그래서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한다. “변론”의 ‘제테시스’는 ‘조사, 논증, 토론, 논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란 “믿음 안에 있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일이다. 그러나 신화와 족보에 마음과 모든 노력을 쏟는다는 것은 논쟁만 일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화와 족보를 복수로 표현하였는데 여러 신화들, 여러 족보들을 가지고 서로 자기 우월성만 주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교훈은 다른 복음이다.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책망하였다(참고 갈 1:6-10).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한국교회는 매머드급 건물의 교회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을 모은 것을 가지고 신화 창조라고 하고 목사의 업적을 드높인다. 서로 정통한 장자 교단이라고 주장하고 목회자의 박사학위를 강조하면서 전통 있는 교회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결국 목사는 자신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교인들은 그런 목사를 우상화하니 복음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복음을 이용하여 인간의 신화를 만드는 일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늘 일어나고 가짜 교회는 득세한다. 복음을 전하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복음은 없었기에 사업에 몰두한 것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5절). “교훈”의 ‘파랑겔리아’는 ‘명령, 교훈’이라는 뜻이고, “목적”이라고 번역된 말은 ‘텔로스’로 ‘끝, 종결, 결론, 마침, 목표’라는 뜻이다. 즉 바울 사도가 이 서신을 쓴 목표, 종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말씀이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파랑겔리아)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4:2)

 

“청결한 마음”(헬, ‘카다로스 카르디아’)은 산상강론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다. “선한 양심”(헬, ‘아가도스 쉬네이데시스’)은 오직 하나님께 해당되는 표현이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 19:17, 막 10:18, 눅 18:19). 이런 점에서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의미한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헬, ‘아뉘포크리토스 피스티스’)란 하나님의 사랑을 수식하는 단어로(롬 12:9, 고후 6:6) 비진리가 없는 상태의 믿음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인의 마음, 죄인의 양심, 죄인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마음, 양심,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확증되었다(롬 5:8). 결국 마음으로 양심으로 믿음으로 날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확인한다는 것은 곧 자기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생명을 살기 때문이다.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6-7절). “벗어나”라는 말의 ‘아스토케오’는 ‘놓치다, 벗어나다, 떠나가, 빗나가다’라는 뜻이고, “헛된 말”은 진리가 아닌 말이고, “빠져”의 ‘에크트레포’는 ‘얼굴을 돌리다, 피하다’라는 뜻이다. 즉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얼굴을 돌려 떠나 벗어난 것은 비진리이다. 결국 “율법”, 즉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나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는 자이기에 스스로 확증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참고 약 2:10).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8절). 우리가 율법을 잘 사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한 것이 되고 악한 것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7:12). 율법은 행하여 의인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도무지 지켜 행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9-10절)라고 전한다. “옳은 사람”의 ‘디카이오스’는 ‘의인’이라는 뜻이다.

이와 대조하여 “불법한 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로 같은 의미의 표현을 세 번 반복하였고, “아버지를 죽이는 자”, “어머니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로 열 말씀을 언급하여 죄인을 극대화하여 세 번 강조하였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행위로 영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부모가 되어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살인”이다(요일 3:15). 또한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인신 매매를 하는 자”로 세 번 반복하였는데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표현이다. “거짓말하는 자”, “거짓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로 세 번 반복하여 의인과 대조하여 진리를 거스르는 완전한 죄인의 상태를 강조한 것이다. 율법을 죄인에게 주신 것은 율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바른 교훈”의 (딤후 4:3, 딛 1:9, 2:1) “바른”의 ‘휘기아이노’는 ‘건강하다, 건전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 ‘샬롬’(평화, 평안, 안식)의 역어로 쓰이는 단어이다. 백부장의 종이 말씀에 의해 “이미 나아 있었더라”(휘기아이노)(눅 7:10)라고 하여 병들었다가 회복된 상태를 나타내고,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건강한(휘기아이노)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눅 15:27) 되었다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훈”의 ‘디다스칼리아’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즉 평안, 안식의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여 생명이 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11절). “맡기신”은 ‘피스튜오’로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라는 뜻이고, “따름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카타’는 ‘~아래, ~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이것(바른 교훈)을 내게 믿음으로 주셨다. 복이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아래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오직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날마다 함께 죽는 것이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 죽음 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존재다(202409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딤전02.0103-11 다른 교훈과 바른 교훈(202409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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