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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8
창세기 31:43-55
야곱과 라반의 언약
드라빔을 찾지 못한 라반은 어떻게 하여야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결과 야곱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빼앗긴 상태에 이르러서야 야곱의 언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반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계속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그것이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43절). 라반이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라고 말한 것은 잠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여전히 다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야곱과 언약을 맺으면서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적 행위를 가지고 자기 의가 충만한 라반에게도 자기 언약을 나타내시기 위해 라반을 이끌고 계신다. 그 표현이 “오늘”이란 말이다. 히브리어 ‘하이욤’은 직역하면 ‘살아 있는 날, 생명의 날’이라는 뜻이다. 라반은 야곱 앞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의 날로 허락하시면 거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래서 라반에게서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고백이 나온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면 무엇을 행할 수 있다는 율법적 자기 행위를 멈추게 된다.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44-46절). “언약”은 ‘베리트’(동맹, 계약, 연합)이고 “맺고”라는 말의 ‘카라트’는 ‘자르다, 베어내다. 파괴하자, 소멸시키다, 언약을 맺다’라는 뜻이다. 언약을 맺는다는 말 속에는 자르고 베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언약을 어기면 자르고 베어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언약을 맺는 라반이나 야곱 역시 율법적인 인간의 행위를 잘라버리는 것을 포함한다. 구별하고 분리하는 잘라냄이 하나님의 창조이고 창조가 곧 언약이다.
“증거”(44, 48, 52절), “돌”(45, 46절), “기둥”(45, 51, 52절), “무더기”(46, 48, 51, 52절), “먹고”(46, 54절)라는 표현은 언약적 요소를 말씀한 것이다. “증거”의 히브리어 ‘에드’는 ‘우드’(이중으로 하다, 두 배로 하다, 반복하다)에서 온 말로 ‘증언, 증인’이라는 뜻이다. 즉 언약은 반복이고 이중으로 강조한 것으로 결코 변하거나 취소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돌”은 ‘에벤’이고 “기둥”은 ‘맛체바’인데 ‘서다, 놓다, 정하다, 세우다’라는 뜻의 ‘나차브’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의 사다리가 서 있음을 나타내며(28:12), 또한 하나님께서 모임 가운데 서신다는 것을 묘사한다(시 82:1). “무더기”는 히브리어로 ‘갈’인데 ‘쌓아 올린 것, 무더기, 샘, 물결, 파도’라는 뜻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4-35)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다니엘이 꿈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말씀이다. 꿈의 내용은 머리는 순금, 가슴과 두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쇠, 발의 일부는 쇠 일부는 진흙으로 된 우상이었는데 돌아 날아와 그 신상을 부서뜨리는 것이었다(단 2:31-33). “손대지 아니한 돌”이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 하늘에서 날아온 돌이라는 의미이다. 그 돌에 의해 세상의 모든 나라는 무너지고 태산을 이루는 무더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태산이라는 무더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신 증거가 된다. 이 예언은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돌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성전이 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결국 돌무더기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신 증거인데 곧 성전이요 언약 백성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먹고”(46, 54절)라는 표현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뜻인데 서로가 하나 된다는 의미로 언약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돌무더기 곁에서 먹고”라는 것은 그들이 성전 안에서 먹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되어 교회가 누리는 되는 생명의 상태를 나타낸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4-11)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6-27)
누가는 “새 언약”(눅 22:20)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야곱과 라반이 맺은 언약은 단순히 서로를 침범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맺는 언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시하는 언약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헬라어로 ‘스타우로스’(막대기, 기둥, 십자가)인데 ‘히스테미’(똑바로 세우다)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기둥은 돌무더기와 같은 증거이고 그 십자가에 의해 생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47-49절). “여갈사하두다”의 아람어 ‘예가르사하두타’는 ‘증거의 무더기’이다.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는데 ‘갈’(쌓아 올린 것, 무더기, 샘, 물결, 파도)과 ‘에드’(증언, 증거, 증인)의 합성어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라고 말한다. 야곱과 라반 사이의 증거는 돌무더기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십자가의 증거가 된다.
“미스바”의 ‘미츠파’는 ‘망대, 망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라반과 언약을 맺은 장소를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신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은 입다를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는 언약을 맺는다(삿 11:9-11).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지켜보신다는 것이다.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5-6, 12)
라반은 야곱에게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50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부된 하나의 교회로 완성된다.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51-52절). 여기서 야곱이 확인하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라반은 자기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야곱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하시고 더 이상 라반으로부터 당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차단하신 것이었다. 야곱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고 심판을 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소관에 있다. 야곱이 잘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시는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 야곱을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은 육신의 보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야곱의 잘못에 대하여 묻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언약을 위해 야곱을 통해 드러내실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다면 죄에 대한 심판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고통을 받고 멸망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결과였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지 이스라엘 자체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를 지키신다는 의미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언약, 즉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창조하셨고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드러내셨다. 결국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현장이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죄악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어떤 이는 아파야 할지도 모르고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고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부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롬 14:8-9).
“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54-55절). 마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타내신 것과 흡사하게 자기 언약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3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출 19:11-13)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게 하신 것은 야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에게 설명하고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202409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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