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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7
창세기 31:31-42
라반의 추격(2)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왔으나 바로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그 추격에 이스라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막으셨고 모세로 하여금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이 되도록 만드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출 14:21-25).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흘림에 의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야곱이 하란을 떠나고자 하나 결코 스스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계시를 주심으로 선악간의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믿는 신이 하나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신이든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신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라반이 이렇게 추격한 중요한 이유는 자기 집의 우상인 드라빔이 없어진 것 때문이었다. 드라빔이란 가정의 수호신으로 자그마한 여성상의 우상인데 가문의 모든 재산권을 행사하는 표징이었다. 그러니 나중에 야곱이 나타나서 드라빔을 가지고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넘겨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끝까지 찾으려고 한 것이다.
라반은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9-30절)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심으로 라반은 더 이상 야곱에게 문제를 삼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라고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선악 체계 속에 있는 죄인의 한계를 보여 준다. “내 신을 도둑질 하였느냐”라고 말함으로 신도 도둑질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선악 체계의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도 판단하고자 하나 결국 하나님의 계시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31-32절). 라반은 율법주의적 인간의 행위에 매인 존재였기에 스스로 자신의 딸들을 쉽게 내어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야곱이 안다는 뜻이다. 율법에 매였다는 것은 땅의 것에 매였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그러기에 혈육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스스로 내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복음으로 알지 못하면 땅적 존재로 땅의 것, 혈육의 것에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란을 떠나도록 하셨고 라반에게 계시를 주셔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알지 못했기에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죄인에게서 우상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은혜이다. 그 은혜로 인해 야곱이 말하는 언약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반은 드라빔을 찾지 못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43절 이하에서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맺게 된다. 라반이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언약을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짓지 않고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면 죄악을 밀어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33-35절).
드라빔은 낙타의 안장 아래에 있고 라헬은 그것을 깔고 앉아 있는 상태가 되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야곱이 알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라헬은 이미 야곱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된 존재였기에 라반의 신 드라빔은 이미 야곱에게 굴복된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주도권은 라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있게 되었다.
라반이 모든 장막에 다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33절), “찾아내지 못한지라”(35절)라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마차’(찾다, 얻다, 이루다, 이르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단어는 4:14에서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만나는”이라는 단어가 ‘마차’이고, 또 6:8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할 때 “입었더라”라는 표현과 같은 단어이다. 즉 가인이 죽음을 면하고 은혜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와 같이 라반 역시 만나야 하는 것은 드라빔이라는 자신의 수호신이 아닌 언약의 은혜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우리 성경에 “생리”라고 번역된 단어는 ‘닛다’(레 12:5, 20:18, 겔 18:6에서 우리 성경에는 ‘월경’이라고 번역함)를 쓰지 않고 ‘데레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길, 도로, 여행, 태도, 방식’이라는 뜻이다. “영접할 수 없사오니”라는 말을 직역하면 ‘얼굴을 대할 수 없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라헬이 생리 중이어서 아버지를 맞이할 수 없다는 표현이라기보다 야곱과 함께하여 언약 안에서 이미 구원의 길로 가고 있기에 율법의 행위에 매인 아버지 라반의 얼굴을 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얼굴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 말씀은 십계명 중의 한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얼굴로 존재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36-37절).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라고 말한 것은 라반이 더 이상 드라빔을 찾을 수 없었기에 분위기는 반전되어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야곱이 화를 내는 입장이 되었다. 야곱이 ‘온전한 자’(25:27)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드러내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허물과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덮고 있기에 허물과 죄가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급히 추격하나이까”라는 말의 히브리어 ‘달라크’는 ‘불타다, 불태우다, 맹렬히 추적하다’라는 뜻이다. 라반이 야곱을 추격하는 모습을 자신의 몸을 불로 태우듯이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러나 인간들은 언약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것은 순전히 율법적 행위에 매여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에 나온 죄악이었다. 단순히 유대인들이나 빌라도, 로마 군병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 ‘나’의 죄악이다.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과 같이 되셔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구원하신 것이다(고후 5: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1-7)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8-42절).
갑자기 야곱이 자기 한탄을 읊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지만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라는 표현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셨기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라고 라반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의 20년에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야곱을 중심으로 하여 만나는 모든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실로 야곱의 지난 20년간의 생활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탐욕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기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언약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야곱이 아직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철저히 야곱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도 기도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편을 들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과 관계없이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는 분이시다. 야곱이 오해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은 언젠가 다시 야곱과 마주하셔서 해결하실 것이다(202409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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