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오후강론)

74. 창세기 27:1-14 이삭의 축복(1)

불편한 진리 2024. 4. 2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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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4

창세기 27:1-14

이삭의 축복(1)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기 위해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말씀에서 목사에게 축복 기도를 받으려면 ‘별미헌금’을 하라는 기괴한 해석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말씀을 왜곡하는 일에 겁이 없는 웃픈 현실에 할 말이 없다. 웃기는 헌금 명목도 그러하지만 마치 목사가 축복권이라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보면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한 것에 역겨움을 느낀다.

본문이 과연 그러한 행위를 하라고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진 것일까?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차원에서 기록되었다. 그 자기 계시는 항상 언약이라는 틀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창세기 27장도 단순히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싸움으로 볼 것이 아니라 왜 이삭은 축복하려고 하며 이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이 장자권을 훔쳤다고 말씀하지 않고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차근차근 살펴보자.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1절).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는데 이때 이삭의 나이는 137세였고 야곱은 77세였으며 이삭은 180세에 사망한다(35:28-29). 문자적으로 보자면 이삭이 나이가 많은 것이었고 눈에 어두운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야곱에게 축복한 후 43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보면 죽음이 임박하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끼고 축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26:35에서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근심”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모라’는 ‘마라’에서 유래한 단어로 ‘쓴 맛, 슬픔, 비통,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즉 에서가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것이 슬픔이나 괴로움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에서는 하나님의 비언약적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할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였지만 여전히 세상적 괴로움과 염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이다.

이삭이 나이가 많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다는 이 말씀을 통해 지금 이삭의 형편이 언약의 상속권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이삭이 축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받은 복을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축복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를 이삭 뿐만 아니라 리브가, 에서와 야곱도 분명히 확인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2-4절).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라는 표현에서 아버지가 죽는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인데 곧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이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안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남자라면 씨 가진 존재로서 씨 없는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 되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이것을 이삭 언약 안에서 다시 보여주고자 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의 아들은 이삭이 유일하였으나 이삭과 리브가 사이의 아들은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인 교회를 보여줄 자를 확인 시켜주시는 차원에서 축복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에게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사냥꾼에 대한 이미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끝까지 추적하여 사냥하고자 하는 대적자의 모습으로 말씀한다(10:9). 이런 점에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25:27)이었다. 그가 가진 “기구”는 “화살통과 활”이었다. “기구”의 히브리어 ‘케리’는 ‘장비, 그릇, 연장, 용구’라는 뜻인데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성막의 기구’이다. 에서는 장막에서 기구들을 가지고 들에 나가서 사냥하여 죽이는 일을 하는 존재로 드러낸다.

“별미”란 ‘마트암’인데 ‘맛보다, 감지하다, 느끼다’라는 뜻의 ‘타암’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약 성경에서 여덟 번 나오는데 27장에서만 여섯 번(4, 7, 9, 14, 17, 31절) 나오고 나머지 두 번은 잠언 23:3, 6에서 “맛있는 음식”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타암’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욥기 12:11에서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타암) 같이”라고 하였고 욥기 34:3에서는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타암) 같이”, 시편 34:8에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타암) 알지어다”, 잠언 31:18에서는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타암)”라고 번역하였다. 이 표현은 단지 음식에 대한 것만 아니라 ‘분별하고, 깨닫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삭은 별미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분별하여 느끼고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의 입장에서는 비록 장자인 에서가 헷 족속과 하나가 되었지만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리브가를 통해 이 일을 다르게 이끌어 가신다.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6-7절).

리브가는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에서가 오기 전에 그 축복을 야곱이 가로채도록 계략을 세운다. 리브가와 야곱 역시 복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이 가진 복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가는 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어떤 방법으로든 이삭이 축복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야곱 또한 들통이 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저주를 자초하는 어머니 리브가의 제안에 동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언약의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삭을 속여서라도 받으면 자신에게 복이 올 것이라는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도 가계의 저주를 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비성경적인 발언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자들은 리브가나 야곱과 같이 참으로 언약의 복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다. 심지어 목사를 이삭과 같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여기고 마치 복과 저주가 목사를 잘 대접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서 나누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가르침은 목사를 양복 입은 무당으로 만들고 말았다.

“리브가가 들었더니”라는 표현의 ‘샤마’는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이다. 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살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이끄신다.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라는 말은 에서는 사냥을 위해 들러 나감으로 겉 사람의 모습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별미는 들에서 사냥된 것이 아닌 장막에서 염소 새끼로 만들어진다.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8-10절). 그렇다면 장막에서 만들어지는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는 언약을 위해 장막에서 희생되는 제물이다. 출애굽 이후 율법에서는 대속죄일의 두 마리 염소는 제물이 되며 또한 광야에 보내어져 희생되는 염소를 상징한다. 성막(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일의 염소처럼 희생되어 언약은 온전히 성취된다.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7-10)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11-14절). 야곱은 속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리브가는 저주를 자초한다. 신부된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저주이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결국 이삭이 축복하기 위한 별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한 시금석이다. 이삭은 에서가 장자였기 때문에 장자권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에서를 불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축복을 하면 야곱에게 속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서에게 별미를 요구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가져옴으로 이삭 자신의 기쁨과 또한 복을 받는 근거를 에서에게 마련해 주기 위한 조치이다. 다시 말해서 별미를 만들어서 복을 전달할 권한이 있는 자를 기쁘게 하는 것을 복 받을 사람으로 구분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이렇게 나타내셨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생명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동산 중앙에 선악의 나무를 두시고 그것을 먹는 분별을 통해 일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즉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그 나무와 하나 됨으로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셔서 은혜로 생명을 허락하시는 언약임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장자라는 것과 별미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이미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언약의 상속자를 자기 입맛을 채워주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로 세워지기를 원했다. 이삭은 눈이 어두웠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후손(씨)이 눈에 보이는 장자이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늘 이렇게 인간의 죄를 폭로하시며 그 죄악들을 고발하시면서 온전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내 언약”(6:18, 9:9, 9:15, 17:2, 4, 7, 9, 10, 13, 14, 19, 21 등)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202404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74.2701-14 이삭의 축복(1)(202404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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