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오후강론)

73. 창세기 26:26-35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

불편한 진리 2024. 4. 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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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3

창세기 26:26-35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

 

블레셋 사람들과의 우물에 대한 다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언약으로 이끄셨는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라”(23절)라고 하였는데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고, “올라갔더라”라는 말의 ‘알라’는 ‘오르다, 떠나가다, 끌려가다, 높여지다, ~에 도달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신 결과에 도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25절에서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삭이 여호와의 이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막을 치고 그 성막을 섬기는 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신약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일하셨던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이삭에게 말씀으로 임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이끌려 왔음을 보여준다. 이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언약(21:22-34)을 그대로 반복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 된 상태에서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말씀한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6-27절).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이 이삭을 찾아왔다. 언약을 맺자는 것을 보아서 둘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두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친구”(히, ‘메레아’)란 적대적인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마 20:13, 22:12, 26:50) 비밀을 공유함으로 동격의 관계를 나타낸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아비멜렉은 아후삿과 비골과 함께 옴으로 이삭과 언약을 맺어 하나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증인을 역할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으로 인하여 밀려서 브엘세바에 온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삭을 이끌어 오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지경을 넓혀(르호봇) 브엘세바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22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28-29절).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그 장소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이삭을 통해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삭을 통해서 그대로 실행하고 계심을 나타낸 것이다.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창 21:31-3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한 이 표현도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하였던 말이다. “분명히 보았으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라아 라아’를 반복한 표현이다. 즉 보고 또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이삭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언약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삭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계약”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베리트’로 ‘언약, 계약, 조약, 협정, 법령, 서약, 동맹’이라는 뜻이다.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창 21:27-30)

 

이삭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으므로 서로 보호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게 하신 것은 단순히 이삭을 보호하시거나 아비멜렉을 보호하시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이삭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히 확인시키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너는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이삭에게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30-31절).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라는 표현은 언약을 맺자고 온 자는 아비멜렉이지만 언약의 주도권은 이삭이 가지고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잔치”라는 말의 히브리어 ‘미쉬테’는 성경에서 신랑과 신부가 하나 되어 하나님 왕국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에 대한 상징어이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평안히 갔더라”라는 표현은 언약으로 화목의 관계가 되었음을 말씀한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말씀은 ‘브엘세바’, 즉 일곱 우물을 통해 일곱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언약을 위한 일하심을 나타낸 것과 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1:5, 8, 13, 19, 23, 31)라는 말씀과 같은 표현으로 어둠이 빛이 되는 언약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미쉬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6-8)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잔치를 열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화목함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잔치라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이다. 진짜 잔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잔치를 통해 하나님 왕국에 참여됨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라고 하셨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기뻐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뻐하고 안 하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천국의 상태이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32-33절).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실상은 이전에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었던 언약에 대한 재확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믿음 없는 이삭에게 확인시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인간은 믿음 없음의 상태의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십자가이다.

이삭이 가나안 땅을 떠났을 때 그랄에서 우물로 인한 다툼의 과정에서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아비멜렉과 언약을 통해 이삭은 약속의 땅에서 주어지는 평화, 안식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하였고 이삭은 그곳을 “세바”(히, ‘쉬브아’), 곧 ‘맹세, 언약’이라고 명명한다. “물을 얻었나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차’인데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라고 하였을 때 그 표현이다. 즉 이삭은 하나님을 만났고 언약을 분명히 확인하였다는 의미이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34-35절). 에서가 “사십 세”에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이삭이 결혼한 나이와 같다. 그런데 성경이 왜 이렇게 에서의 나이를 굳이 밝히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서 ‘40’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로 보여주듯이 ‘시험과 고난’의 상징이다. 그러나 시험과 고난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로 주어지느냐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어진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이 되어 애굽에 갔다가 다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즉 죄인으로 상징이 되는 족속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사십 세 결혼(25:20)은 믿음 없는 존재에게 언약을 주셔서 믿음으로 이끌어가심을 보여주는 쪽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는 관계없는 상태로 버려두신 상태를 보여준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오실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은혜를 입지만 에서는 언약의 후손이 오시기까지 아직은 헷 족속과 결혼하여 다른 복음을 좇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에서는 ‘사십’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것을 보여주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다른 복음을 좇는 종교생활로 음행하여 우상숭배하는 모습인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에서 약속의 땅에 이끌려 들어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40일 시험과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험으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완성된 말씀 안에서 그렇게 ‘사십’을 견디는 존재이다(202404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73.2626-35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202404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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