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오후강론)

72. 창세기 26:12-25 이삭에게 주신 언약(2)

불편한 진리 2024. 3. 31. 16:33

https://www.youtube.com/live/QmjQ-naVvCU?si=K-KhoXnItFoOab0k

 

 

창세기 강론 72

창세기 26:12-25

이삭에게 주신 언약(2)

 

우물에 대한 사건을 왜 이렇게 길게 말씀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우물은 만남의 장소로 나타내며 또한 우물은 물에 대한 문제이고 그것은 곧 말씀, 진리에 대한 문제이다. 단순히 블레셋 사람들과 물리적인 우물에 대한 다툼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12-14a절). “그 땅에서 농사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자라’는 ‘씨를 뿌리다, 심다, 퍼뜨리다, 열매를 맺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농사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대로 이삭을 통해서도 이루어 가심을 나타내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언약의 자손(씨)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다. 그래서 “그 땅”, “그 해”라고 말씀하신다. “그 해”(히, ‘샤나 후’)란 문자적으로는 ‘년, 해’라는 뜻인데 어떤 특정한 것으로 지정되었다는 의미의 ‘년, 해’라는 의미이다. “그 땅”이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고 그 언약이 주어진 그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 배나 얻었고”라는 표현도 당연히 농사를 하여 추수를 백 배로 하였다는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백 배”라는 표현은 완전성을 상징한다.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백 세에 아들을 주심으로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삭을 통해 완전하게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얻었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차’는 ‘찾다, 얻다, 이루다, 만나다’라는 뜻인데 미완료형으로 표현하였다. 4:14에서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라고 번역하였고, 6:8에서는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하였을 때 “입었더라”가 ‘마차’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언약을 주시기 위해 만나시고 은혜를 입히시는데 계속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창대하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가달’은 ‘크게 되다, 나아가다, 자랑하다, 강해지다, 찬양하다’라는 뜻이다. 또한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고 번역하였는데 “거부”라는 표현도 ‘가달’이다. “마침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아드’인데 ‘~하는 한, ~까지, ~하는 동안’이라는 뜻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동안’이라는 의미이다. 믿음 없는 이삭을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으로 이끌어 가시니 그 말씀에 합당한 존재로 이끌림을 받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그대로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가달)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사무엘이 자라매(가달)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

 

“왕성하여”란 히브리어로 ‘얄라크 할라크’인데 ‘얄라크’나 ‘할라크’ 두 단어가 동일하게 ‘가다, 오다, 걷다’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걷고 걷는다’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 두 사람이 동행하였다고 할 때는 ‘얄라크’를 썼고(22:6),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에 대해서는 ‘할라크’를 썼다(5:22, 24, 6:9). 이 두 단어 자체가 반드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얄라크’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 ‘할라크’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이삭이 그랄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분명 혼자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동행하고 계셨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이삭은 믿음 없음의 상태로 살고(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언약의 복이 주어져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애굽, 광야, 가나안이라는 삼일 길을 가듯이 이삭을 그렇게 언약의 말씀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라는 말씀은 문맥상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다.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한 곡물이 많았다고 하지 않고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농사를 지어 양과 소 떼를 마련하였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이미 농사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면 이렇게 표현한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종”은 ‘아붓다’라는 단어인데 ‘아바드’(섬기다)에서 온 말이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이삭이 언약의 복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풍성하게 되어 그것을 다스리는 상태가 되었음을 암시한다는 말씀이다.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5-26)

 

따라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대로 이삭을 이끌고 계신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시행하셨기에 강하게 되고 창대하게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을 주시는 동안이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4b-16절). “시기하여”라는 말의 ‘카나’는 ‘시기하다, 질투하다, 열심을 내다’라는 뜻인데 이 말에서 유래한 단어가 ‘칸나’(출 20:5)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열심, 질투는 언약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공격이며 또한 분리이다. 이것은 율법적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의 태도이다.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라고 하였는데 우물의 상징성은 만남의 장소이다. 그 만남은 말씀 안에서의 만남이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를 자기 의로 여기는 자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근원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메웠더라”의 ‘말레’는 ‘채우다, 가득차다, 충만하다’라는 뜻이다. 즉 진리의 근원이 되는 말씀을 덮고 율법적 행위로 충만하게 한다. 그 자기 의가 “흙”, 곧 ‘먼지’라는 뜻을 지닌 ‘아파르’이다(블레셋의 ‘펠리쉬트’는 ‘먼지 속에 구르다’라는 뜻의 ‘팔라쉬’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떠나라”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떠난다.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로 온전히 드러나면 율법적 행위는 죄로 폭로되기 때문이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이라고 할 때 “강성한즉”의 히브리어 ‘아참’은 ‘강대하다, 강력하다,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애굽은 언약으로 충만하여 강하게 된 이스라엘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아참)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말레)(출 1:7)

 

 

유대인 종교지도자들 중의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자신을 죄인과 철저히 분리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복음,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면 인간은 자기 죄로 쌓은 의를 가지고 거부하는 열심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들의 열심이다. 예수님을 죽이고 나는 율법에 철저하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2-4)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17-18절).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언약을 주심으로 이삭이 성막(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삭이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삭을 이끌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이끄셨던 아브라함 언약을 다시 반복하여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19-22절).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다는 것은 장막, 즉 성막에는 진리를 위해 섬기는 자들이 있고 그 일들을 통해 “샘 근원” 곧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의 근원이시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진리의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언약이고 그 언약이 지향하는 ‘씨’(후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그러므로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라는 표현을 통해 우물에 대한 다툼은 결국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증거가 “에섹”(히, ‘아사크’), 곧 ‘다툼’이라는 것으로 드러났다. “싯나”는 ‘사탄’에서 유래한 단어로 ‘대적, 대항’이라는 뜻이다. 진리를 대적하고 싸우는 다툼이 비진리에 속한 자의 특징이다.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하였는데 ‘레호보트’는 ‘넓히다, 넓게 하다, 공간을 만들다’라는 뜻을 지닌 ‘라하브’에서 온 말이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라하브)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21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신 12:20-2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3-25절).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언약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며 믿음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 우물로 인한 다툼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라는 표현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삭을 복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그 복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2024033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72.2612-25 이삭에게 주신 언약(2)(20240331).pdf
0.1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