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오후강론)

75. 창세기 27:15-29 이삭의 축복(2)

불편한 진리 2024. 5. 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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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5

창세기 27:15-29

이삭의 축복(2)

 

이삭이 언약을 이을 장자에 대한 축복을 한다는 것은 아브라함 때와는 다른 상황이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은 이삭이 유일하였기에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은 당연히 언약에서 밀려나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에서는 두 아들이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한 부모 아래에서 누가 언약의 상속권을 이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삭이 축복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복을 받도록 기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흔히 이삭의 축복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축복권을 가진 목사가 안수기도를 하고 교인들은 기도를 받는 그런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목사에게 축복권이 있다는 주장도 웃기는 것이지만 기도를 해 주고 기도를 받는다는 표현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이상한 종교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15-17절).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이란 물리적으로 좋은 옷이라는 말이 아니라 비록 에서의 옷이지만 맏아들의 옷이 야곱에게 언약의 복을 이어가게 하는 좋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에서는 사냥을 하는 역할을 통해 율법적인 인간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통해 언약을 이어가기로 하셨기에 율법이 좋은 역할을 하도록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2-13)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어 율법의 옷으로만 언약의 복 안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라고 말씀한다. 이미 별미로 만든 “염소 새끼 두 마리”(9절)는 언약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이라는 의미를 살펴보았었다. 속죄일의 염소처럼 희생되어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에 입혀져야 한다는 것은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입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판이 주어지고 은혜가 입혀져야 하는 사람에 대한 창조 언약의 계시를 하나님께서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순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옷을 벗겨내시고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려지고 죽임을 당함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벗겨내고 새로운 옷을 입히실 것이라는 의미의 가죽옷이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는 야곱은 그렇게 심판의 대상이 되는 죄인을 철저히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약의 실체가 오시면 희생으로 덮어 주셔야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야곱과 같이 속이는 비진리에 속하는 우리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덮어주시는 은혜가 될 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별미와 떡”은 야곱이 만든 것이 아니라 리브가에게 받은 것이다. 리브가에게 받았다는 것은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교회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야곱이 받은 것은 교회가 먹어야 하는 양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여기서 별미는 이미 앞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사냥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장막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양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의 양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보여준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4-35)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 안에 있는 자는 그분과 하나 된 자이다. 이것이 말씀을 받아 양식으로 삼는 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설교라는 명목으로 세상의 뉴스나 전하고 우리가 어떻게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는 말하는 것을 복음으로 여긴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를 찾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8-19절).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라는 표현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모습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마 26:29, 39, 42), “나의 하나님”(마 27:46)이라고 불렀다. 이는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과 ‘너의 아버지, 너의 하나님’을 구분하신 것이다.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을 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야곱이 언약의 상속자를 정하는 축복을 하는 이삭을 “내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는 물음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과 같은 것이다. 아들 됨의 정체성 확인이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장자 에서를 흉내 내어 아들이라고 말한다. 비진리에 속하여 거짓을 말하는 죄악 된 우리의 모습이다. 교회요 성도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마음껏”(4, 19, 25, 31절)이라는 표현이 4번이나 강조되었다. 히브리어로 ‘네페쉬’인데 ‘숨 쉬는 존재, 살아 있는 존재, 생명력, 영혼, 생명, 신체, 동물’이라는 뜻이다. 1:20, 21에서 “생물”, 1:30에는 “생명”, 2:7에서는 “생령”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이삭이 자기 마음껏 축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넘겨주는 것이 이삭의 축복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생명을 넘겨주는 축복이다. 그래서 영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그 언약 안에 유일한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 축복이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20절).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를 찾은 야곱은 이삭의 물음에 자신이 에서라고 답하고 직접 사냥한 고기라고 말한다. 여호와를 거론하기까지 대담해졌다! 또한 이삭이 두 번째 물었을 때도 자신이 분명히 에서라고 대답했다(24절).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함으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더 이상 그에게는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는 옹졸하고 소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저주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거나 혹은 계시를 빙자하여 불의한 방법을 죄의식 없이 함부로 범하는 악한 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복을 받고자 하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택한 자가 언약의 복을 이어가도록 조치를 취하고 계신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신다. 그러기에 십자가 은혜는 반드시 하늘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임을 말씀한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1-23절).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는 표현에서 음성은 말이고 손은 능력을 의미한다. 야곱에게 덮혀진 은혜의 말씀으로 장자가 되는 능력을 나타낸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은 장자 에서는 죽고 야곱으로 산 자가 되어 언약의 복을 이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24-26절). 이삭이 먹은 음식과 포도주로 희생 제사를 보여준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입맞춤으로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절). “옷의 향취”는 가죽옷을 통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 향취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다(출 29:18 등). 심판받으신 오직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취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하늘의 이슬”은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만나로 내려지는 말씀을 상징한다(출 16:13). “땅의 기름짐” 역시 하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땅은 기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강조한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12:3)이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언약의 성취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202405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75.2715-29 이삭의 축복(2)(202405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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