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13.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의 복

불편한 진리 2024. 3. 2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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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3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의 복

 

산상수훈을 산상강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단순히 윤리도덕 강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본질을 밝혀 주시고 율법에서 말씀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시겠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라고 선언하셨고 그 천국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산상강론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의 상태가 되는 천국을 말씀하셨다는 차원에서 산상강론을 이해하여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절). 본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다. 그 애통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애통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가 애통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애통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는 결코 애통이 복이 될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임한 하늘 왕국에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선언하셨다.

“애통”을 국어사전에 보면 “몹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함”이라고 정의한다. 헬라어로는 ‘펜데오’인데 ‘슬퍼하다, 애통하다, 약해지다, 기운이 빠지다, 번민하다’라는 뜻이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펜데오)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막 16:9-10)

 

헬라어 ‘펜데오’는 ‘고난을 당하다, 견디다, 죽다’라는 뜻을 지닌 ‘파스코’에서 유래하였고, ‘파스코’는 ‘유월절’이라는 뜻의 ‘파스카’와 연결된 단어로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페사흐’이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흠 없는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다(출 12:1-11). 그리고 유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신 16:1-3)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 하였다. 즉 유월절에 고난을 상징하는 무교병과 함께 쓴 나물을 먹는 것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니라”라는 표현이 ‘자카르’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일에 고난의 빵인 무교병, 누룩이 없는 것으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7-8)

 

세상적 일로 우울하고 슬퍼하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에 함께 죽음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애통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유월절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룩 없는 빵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묵은 누룩”, 즉 구약의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란 단순히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지칭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단어는 ‘펜둔테스’로 현재형으로 표현되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의 의미로 계속 이런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지금 계속 반복적으로 애통하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이 땅에 사망의 몸으로 존재하는 동안은 언제나 죄의 법을 좇고 섬길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롬 7:21-25).

가난은 고통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난한 자’라고 할 때 히브리어 ‘에브욘’은 ‘결핍, 모자람, 부족함’을 함의하나 ‘아니’는 ‘고통받는, 억압받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애통하는 자”는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절)라는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된다. 영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 결핍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구약에서 이렇게 연결하여 같이 말씀하였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3-6)

 

앗수르에 의해 북쪽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여 도시는 폐허가 된 상황에서 철저한 상실과 절망적인 현실로 인한 애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시온”에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을 전하시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심으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예언한다.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고난과 죽음은 자기 백성의 죄악을 담당하심이다. “시온”은 성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전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것이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가진 상태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자이고 애통하는 자이다. 가난하고 애통한 것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벗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애통을 홀로 받으시며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다. 언약이 완성된 십사만 사천이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 이름이 된 것이다.

“위로”라는 말의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인데 ‘파라’(~곁에)와 ‘칼레오’(부르다, 초청하다, 소환하다, 권하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자기 곁에 부른다’라는 말이다. 수동태로 표현되었으니 ‘위로를 받는다’ 혹은 ‘자기 곁에 부른다’라는 것은 위로를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의미이다. ‘파라칼레오’는 히브리어 ‘네하마’ 또는 ‘나함’의 역어인데 ‘위로하다’ 외에 ‘강하게 하다’(신 3:28, 욥 4:3), ‘인도하다’(출 15:13)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구약에서 말씀한 것(시편 135:14에서는 ‘나함’을 쓰고 있다)과 이런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바울 사도가 선포한 것을 보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네하마)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3-5)

 

교회가 받는 위로란 바울 사도 자신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수동태로 표현한 것은 천국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초청하여 위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위로가 어떤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파라칼레오’의 명사가 ‘파라클레토스’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였다(참고 요 15:26, 16: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애통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을 새 언약으로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마음에 진리를 새기는 성령을 주실 수 있었다(렘 31:31-34, 겔 36:26-28).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진 진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영생을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그래서 누가복음의 소위 평지강론에서는 우는 자는 웃고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 것이라고 말씀하였다(눅 6:21-25)(202403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13.0504 애통하는 자의 복(202403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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