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11. 마태복음 5:1-2 산상수훈

불편한 진리 2024. 3. 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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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1

마태복음 5:1-2

산상수훈

 

5장에서 7장까지의 세 장은 ‘산상수훈’(山上垂訓), ‘산상보훈’(山上寶訓) 또는 ‘산상설교’(山上說敎)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누가복음 6:17-49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흔히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눅 6:17)라고 하였기에 ‘평지설교’라고 한다. 그래서 산상수훈과는 다른 말씀의 반복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지만 같은 말씀의 축약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의 평지로 이해한다면 산상수훈과 다른 말씀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산상수훈이란 한마디로 산에서 베푸신 교훈이라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이 윤리도덕 강령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산상수훈만큼은 매일 읽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단순히 우리의 삶에 필요한 지침 정도로 이해할 말씀이 아니다. 신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 근거하여 언약을 성취하시는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1절). “무리”란 헬라어로 ‘오클로스’인데 ‘백성, 무리, 군중, 떼, 대중, 군대’라는 뜻으로 구약 히브리어의 ‘하몬’(군중, 무리 / 왕상 20:13), ‘하일’(군대 / 단 11:25), ‘암’(무리, 백성 / 창 11:6, 민 20:20), ‘카할’(총회, 무리, 모임 / 겔 16:40, 렘 31:8)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무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6-8)

 

한 족속, 한 언어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 성과 탑을 쌓는 자들로 언급하였다. 즉 많은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을 향해 맞서는 존재들이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니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져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4:24)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4:25)라고 하였다. 각종 질병의 고통 속에서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을 “무리”라고 표현한다. 질병의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행위로 천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다.

“보시고”라는 말의 ‘에이도’는 ‘보다, 알다, 경험하다, 방문하다, 느끼다, 생각하다, 인지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에 매여 율법적 행위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은 단순히 윤리강령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밝히시고 그 율법이 보여주는 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산이 있으니 산에 올라갔고 그 산에서 교훈을 하셨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마태는 본서를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치밀하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본문들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마태복음의 초두에 나오니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자 바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성경학자들이 사복음서를 시간 순서로 정리한 것을 보면 중기 갈릴리 사역 때 일이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 갈릴리에서 몇 제자를 부르시고 가나에서 첫 표적을 보이신 후 유대로 잠시 가셨다가(요한복음의 기록)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을 하시는데 보통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산상수훈은 중기 갈릴리 사역 때 열두 제자를 세우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마태가 상당히 앞에 배치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구약 창세기에서 표현한 ‘톨레도트’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아들 낳는 역사를 이루시는데 그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사건이 있는데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은 남자 아이를 죽이는 바로 왕과 같은 헤롯 왕에게서 벗어났음을 소개한다. 이 일을 마태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2:15)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 죽음을 향해 첫발을 내딛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은 것이었고 광야 시험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신 메시아이심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라고 하여 하나님 왕국이 임하였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어부를 부르심으로 하늘 왕국이 찾아오는 것을 보이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가셨다. 이 여정이 출애굽 여정이라면 예수님이 오르신 산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시내 산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출 19:20-21)

 

1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 4:1-4)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만나고 아래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백성의 장로 칠십 명이 있었고(출 24:1), 산 아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다. 언약을 맺으신 후 세 부분으로 나눈 시내 산의 이 구도를 그대로 옮겨 성막으로 만들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올라가”라는 ‘아나바이노’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산에 오르셨다는 표현이 아니라 출애굽의 성막이 보여 주는 바 곧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온전한 성전으로서 율법의 말씀을 본질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앉으시니”란 ‘카디조’인데 ‘앉다, 머무르다, 임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것, 재판장이 재판하는 자리에 앉은 것에 쓰이는 단어이다(요 19:13, 행 12:21, 엡 1:20). 헬라어에는 ‘카타클리노’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하는 자세’(눅 7:36, 9:14, 15, 24:30)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우리 성경에는 두 단어 다 ‘앉는다’라고 번역하였다. 예수님께서 앉으셨다는 것은 왕의 권세로 말씀이 임하게 하시는 것이다. ‘카디조’라는 단어를 다른 본문에서 이렇게 나타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카디조)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카디조)(행 2:3)

 

“제자”란 ‘마데테스’로 ‘배우다’라는 말의 ‘만다노’에서 유래한 단어로 ‘배우는 자, 생도, 제자’라는 뜻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된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제자란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는 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온전하게 하여 자신과 하나 되게 만드시는 은혜를 베푸는 대상이다. 그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40)라고 말씀한다.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었으나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전제하셨기에 제자들은 하나님 왕국의 온전한 말씀의 은혜를 앞서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표현한 말씀이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2절)라는 묘사이다. 입을 열지 않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입”(헬, ‘스토마’)이란 말하는 기관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말씀이라고 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입을 여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다. 그냥 말씀하셨다고 해도 되지만 성경은 “입을 열어”라고 표현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열어”라는 말의 ‘아노이고’는 ‘아나’(위에)와 ‘오이고’(열다)의 합성어로 ‘열다, 장애물을 제거하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아노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아노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말씀의 용례를 보면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는 것은 단순히 입을 열어 말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신 하늘의 상태를 “열린 문”이라고 나타낸다(계 4:1). 그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하셨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시온산에 선 것의 또 다른 표현이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것으로 나타내는데 그들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교훈의 의미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산상강론’이라고 하면 좋겠다)은 우리더러 이렇게 지키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에 무지와 무능함에 갇혀 있는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왕국임을 나타내신 것이다(202403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11.0501-02 산상수훈(202403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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