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29. 누가복음 13:10-17 여자여 네 병에서 놓였다_귀신 들린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22. 11. 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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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29 _귀신 들려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심

 

누가복음 13:10-17

여자여 네 병에서 놓였다

 

죄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고 믿음 안에서의 행위만 용납되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은 다음에는 선한 행위가 나오고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라고 하였고, 또한 그의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 쓴 편지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를 범하는 존재이지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이런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요 죽은 자로 드러남을 통해 생명을 확인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런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니 성경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인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면서도 신약의 명령어들을 새로운 율법으로 이해하고 자기 행위로 지켜내려고 한다. 회당과 같은 예배당을 성전이라 하고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며 새로운 율법을 고수한다. 대한예수교라고 간판은 걸었지만 유대교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 ‘대한유대교’일 뿐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이적으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기에 문맥을 잘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13:1 이하에 보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에 섞은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죄가 많아서 그렇게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죄가 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시며 그 회개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지기가 열매를 맺도록 일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6-9절). 그 포도원지기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0-11절). 현대 의학으로 보자면 ‘허리협착증’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귀신 들려”라고 하였는데 ‘영에 소유되어 있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허리가 아픈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말씀한다.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귀신 들린 상태는 자해를 한다든지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여자는 허리가 꼬부라진 질병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열여덟 해”란 사탄에게 완벽하게 붙잡혀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14절에 보면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엿새”란 율법에 의해 일에 사로잡혀 있는 날들이다. 이 날들에 완전수 ‘3’을 곱하면 ‘18’이 되는데 사탄에게 완벽하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3:4에서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이라고 하여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랍비로서 종종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회당장으로부터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사탄에 매여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2절)라고 하셨다. “놓였다”라는 말 ‘아폴뤼오’는 ‘아포’(~에서부터)와 ‘뤼오’(ㅍ풀다, 해방하다)의 합성어로 ‘석방하다, 풀어 놓다, 해고하다, 내쫓다’라는 뜻이다. 즉 단순히 질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 매인 자를 풀어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는 “안식일”이었고 또한 “회당”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이적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무엇일까? “안식일”, “회당”이라는 표현을 통해 율법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핵심을 말씀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 가운데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율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것이 안식일에 위급하다고 할 수 없는 자를 고치셨다고 무리에게 화를 내는 회당장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안식일 규례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리에게 분을 발한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절). “풀어내어”라는 말은 헬라어 ‘뤼오’인데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 취소하다, 폐지하다’라는 뜻으로 풀어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마가복음 7:35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실 때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외식”이라는 ‘휘포크리테스’는 ‘위선자, 해석하는 자, 설명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는데, 고대 사회에서 ‘연기자, 배우’를 가리킨 말이다. 즉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의미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 분인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종교 행위로 보여주려고 했다는 뜻이다.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자기 편의대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이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행위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려는 외식이다. 정작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5)

 

그래서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6절)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을 위해 풀어 주면서 사탄에게 매인 여자를 풀어 주는 것에 대해 비난한 것은 이 여자를 소나 나귀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사탄에게 매인 것에서 풀어 율법에 매인 회당에 모인 자들과 대조하여 이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다. 안식이란 한마디로 죄인들의 노동을 금하여 쉼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셨다(출 35:2).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5)

 

결국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란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 꼬부라져 있어서 하나님의 안식과는 상관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은 음녀와 하나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자란 사탄에게 사로잡혀 음녀가 된 자를 상징한다(계 17:3-5).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심을 통해 자신의 죽음으로 그 여자를 사탄의 권세에서 빼내어 자신의 몸 된 교회로 만드신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7-18)

 

우리 성경에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데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라는 물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율법을 고수하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사탄에 매여 꼬부라진 자들을 해방시키는 대속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신다는 선언이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안수”라고 번역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능력의 손을 대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이 영광인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십자가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매인 여자를 풀어 해방시키신 것은 앞으로 이루실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빼내어 생명을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표적이었다.

여기서 “펴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노르도오’라는 단어인데 ‘세우다,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사도행전 15:16에서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나타내었고, 히브리서 12:12에서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말씀하여 하나님께서 아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징계하나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게 하시는 은혜를 설명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17절).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드러내셨으나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무리들은 영광스러운을 그저 기뻐할 뿐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이 본문에 연결시켜 소개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8-19절). 흔히 이 비유를 가지고 천국의 확장성 또는 놀라운 결과가 될 것이라는 비유로 해석하나 사실은 그와는 반대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왕국은 점점 더 확장되거나 놀라운 결과로 커져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완전한 왕국으로 주어졌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왕국을 비정상적인 확장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또한 누룩 비유 마찬가지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0-21절).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숨겨 섞는 여자는 바로 이러한 음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합당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흡족한 가루 서 말이라는 하나님 왕국에 여자가 누룩을 숨겨 넣어 퍼지게 함으로 천국을 변개시키고 확장된 것처럼 속이려는 음녀의 활동이 추수 때까지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 늘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누룩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말씀이다.

회당장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행위를 하나님 왕국으로 여기는 그것이 겨자씨고 누룩이라는 실상을 드러내셨다(눅 12:1). 안식일을 지키고 회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종교적 행위로 열심을 내면 영생을 얻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탄에 매여 꼬부라진 여자와 같은 모습임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라는 말씀이다. 십자가 죽음을 반드시 이루심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풀어 주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안식 안에 있는 자들이다(202211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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