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28. 마가복음 8:22-26 밝히 보는지라_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22. 10. 26. 13:19

https://youtu.be/G00pWlPyr10

 

 

예수님의 이적 28 _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심

마가복음 8:22-26

밝히 보는지라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이적은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러기에 다른 복음서의 병행 본문과 함께 살펴볼 수 없고 본문을 문맥을 통해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본 이적에서 가질 수 있는 해석의 몇 가지 의문점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왜 눈에 침을 뱉아 고치셨는가? 왜 한 번에 고치시지 않고 두 번에 걸쳐서 안수하심으로 고치셨는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마을에서 바로 고치지 않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또 고치신 후에는 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는가?

우선 본문의 문맥을 좀 살펴보자면 7:1 이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갈릴리 지역을 떠나 두로 지방을 가셔서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치셨고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러 귀먹고 말 더듬는 자들 고치셨다.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나타내신 것이 8장에 기록되었다. 이 이적 때문인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라고 하신 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들과 분리하신 것이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것을 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수군거리며 우리에게 떡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19절)라고 하셨고 또한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20절)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절)라고 물으셨다. 이 말씀이 제자들의 답변을 요구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벳새다 맹인을 고치시는 이적을 보여주신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22절). 성경은 맹인의 의사나 의지를 전혀 표현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 손 대시기를 구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맹인을 불쌍히 여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가복음에서 “사람들”이라는 말은 35회, ‘무리’ 혹은 ‘큰 무리’라는 말은 42회 기록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존재로 나타낸다. 그들은 그저 이적 자체를 따르는 자들에 불과하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자들이 요구한 것은 헬라어로 ‘에피티데미’, ‘손을 위에 얹다’라는 뜻이었고 여기서는 ‘하프토마이’, ‘만지다, 대다, 잡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의 갖가지 요구를 다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요구를 가지고 나오는데 이것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고 곧 종교 생활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이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23절). “데리고 나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크페로’인데 이 단어는 죽은 자를 메고 나가는 것(행 5:6,9,10 / 참고 눅 15:22, 딤전 6:7, 히 6:8)),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자를 데리고 나온 것(행 5:19)으로 표현된다. 즉 맹인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죽은 자로 말씀한다.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라고 하였고 또한 고치신 이후에도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셨다.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것은 죽은 자를 광야로 끄집어내신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8:4에 보면 광야에서 사천 명을 먹이심으로 ‘하나의 떡’(14절), 즉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요 6:35,48).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모르고 있는 광야의 상태였다.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 8:17-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8)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1-2)

 

보지 못하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고 곧 마음이 둔한 것, 마음이 어두워진 것으로 말씀한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상태 그것을 반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맹인이란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반역의 상태이고 죽은 상태이다. 우상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같은 것으로 저주 아래 죽은 것이다.

 

15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18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 135:15-18)

 

광야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침을 뱉으심으로 수치와 모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죽음 수치와 모욕의 상태를 예수님께서 받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셔야 되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이렇게 말씀한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24절). “나무”란 사람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생명이 없는 상태를 표현한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로 말씀하신 것은 참 이스라엘로 진짜 사람으로 오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인 것은 맹인이 본다고 하지만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죽은 상태의 자기 자신을 본다는 뜻이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25절). “밝히 보는지라”의 헬라어 ‘엠블레포’라는 말은 ‘분명하게 보다, 열중하여 보다, 주목하다,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광야에서 4,000명이 떡을 먹었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즉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죽은 자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셔야 한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는 십자가를 통해 생명을 주셔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이 이적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이적 역시 표적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에 의한 언약 성취를 이렇게 선포하였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이끌어내신 것은 언약을 맺으시기 위함이었다. 그 언약의 성취를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셔서 눈을 뜨게 하여 밝히 보게 하신 것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말씀하셨다. 흔히들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반역의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마음이 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 보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절)라고 물으신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즉 십자가에 죽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십자가에 죽는 그리스도를 제자들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항변하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33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십자가를 거부한다. 그것이 곧 사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앞서가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는 것이고 보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본다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맹인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를 보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는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26절).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면서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맹인의 집에 보내시면서 마을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광야의 상태에 머물러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운 맹인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진 생명이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과정에서 맹인이 되었던 상태로 성경은 말씀하고 그 후의 고백을 이렇게 말씀한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바울 사도는 과거 율법으로 살았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누구나 다 성경의 율법이 아니면 스스로의 율법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하여 영생을 취하려고 하지만 맹인으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 죽음의 상태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죄다. 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욕,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202210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28.막0822-26 밝히 보는지라_벳새다 맹인을 고치심(2022010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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