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31. 누가복음 14:1-6 끌어내지 않겠느냐_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22. 11. 2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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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31 _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치심

 

누가복음 14:1-6

끌어내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4장은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치신 이적(1-6절)과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에 대한 비유(7-14절), 이어서 큰 잔치 비유(15-24),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말씀(25-35절)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에 일어난 이적을 통해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단초가 된다. 그렇다면 수종병자를 고치신 이적을 나타내신 배경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문맥을 살펴보면 13장에서 회개가 없다면 멸망 당할 것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비유(6-9절)로 말씀하신 후 회당에서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셨다(10-17절).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처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다(22-30절). 율법주의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선지자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던 그 마음으로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4절)라고 하셨다.

선지자를 죽이는 예루살렘을 말씀하신 후 수종병을 고치신다. 예수님은 율법에 찌든 그들을 고발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서 이적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1절).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카이’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등의 뜻이 있다. 즉 13:33-34 말씀과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바리새인의 안식일 식사에 참여하신 것은 그것 자체로도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고 회개의 기회라는 비유적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엿보고 있었다. “엿보고 있더라”라는 헬라어 ‘파라테레오’는 ‘파라’(~에게)와 ‘테레오’(지키다, 감시하다, 파수하다)의 합성어로 ‘자세히 관찰하다, 옆에서 지켜보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을 자신들의 율법적 정신 아래에 두고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은 아시고 수종병자를 고치신다.

“(그리고 보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절). 우리 성경에서 “수종병 든 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에서 남성 단수로 되어 있는 걸로 봐서 남자인 것으로 보인다(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보라, 그분 앞에 수종이 있는 어떤 남자가 있더라”라고 번역하였다). 이전 개역한글판에서는 ‘고창병’이라고 하였는데 개정되면서 “수종병”으로 표현하였다. ‘수종병’이란 ‘복부에 물이 차서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고 몸이 붓는 병’이라고 한다. 헬라어로는 ‘휘드로피코스’인데 ‘휘도르’(물, 많은 물, 강물)와 ‘옵타노’(보다, 나타나다, 처리하다)의 합성어로 물이 나타나는 병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인의 몸에서 유출되는 상태는 다 부정한 것이었다(참고 레 15:1-18). 이런 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있었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데려다 놨는지 아니면 참관자로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시고자 그 자리에 두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수종병자를 두고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하였는지 아니면 안식일을 범하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답변을 하시는 형식으로 말씀하신다.

누가가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이적 자체를 보여주고 설명하려고 한 것보다 이 이적을 모티브로 삼아 율법을 고수하며 지키려는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보내시고”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헬라어 ‘아폴뤼오’는 ‘석방하다, 풀어 놓다, 용서하다, 자유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질병을 치유하시는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위해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말씀을 먼저 보자.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말씀은 대표적으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소위 ‘열 말씀’에 나오는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로 말씀하신 반면, 신명기에서는 애굽에서의 ‘구원’으로 말씀하셨다. 이 둘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구원을 새 창조의 차원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안식일이 보여주고자 한 안식은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님을 책잡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가 단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기득권을 가진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병들어 소외된 자들에게도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으로 죄인이 율법 지키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드러내셨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하면서도(눅 6:1-11, 13:10-17)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논증에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자(눅 13:10-17, 14:3-6) 그들의 실제 생활과 관련된 문제로 말씀하셨다. 수종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육의 아들이나 가축을 우물에서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물”이란 말의 헬라어 ‘프레알’은 ‘우물, 구덩이, 심연’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요한계시록 9:1-2에서는 ‘프레알 아뷧소스’라고 하여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 무저갱이라는 의미로 썼다. “끌어내지 않겠느냐”라는 말의 ‘아나스파오’는 ‘끌어 올리다, 당겨 올리다’라는 뜻이다. 사도행전 11:10에서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라는 말씀에서 “끌려 올라가더라”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물이 차는 수종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가지고 우물에 빠진 소를 끌어내는 것과 연관하여 말씀하셨다. 수종병자가 우물에 빠진 자요 곧 율법에 빠진 자요 곧 죄의 권세에 매인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안식일 교리에 잠겨 있는 수종병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수종병이 들었다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 율법에 빠진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그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심으로 율법에 빠진 자를 끌어내시는데 단순히 빠진 곳에서 끌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로 끌어 올리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라는 말씀으로 본 이적은 끝맺는다. 4절에서도 “그들이 잠잠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율법주의에 빠져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곧 낮은 자리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 그것이 천국이다. 다시 말해서 수종병자를 고치신 것은 죄인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시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하늘에서 죄 없는 분이 낮은 자리로 오셔야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7절 이하의 말씀은 높은 자리 앉아 있다가 더 높은 자가 오면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만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오히려 높은 자리로 가게 되는 경우가 있기에 우리는 이런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다 높은 자리, 즉 하늘 나라를 원하나 그 높은 자리는 죄인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늘에서 오신 진짜 높으신 분이 스스로 죄의 권세 아래 낮은 자리로 오셔서 홀로 심판을 감당하심으로 대속의 죽음으로 섬기기위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2-1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한마디로 하자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난한 자란 어떤 의미인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뿐만 아니라 이 비유와 연결된 문맥 속에 있는 다음 비유 속에서도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과 저는 자들”(21절)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모든 본문에서 몸이 불편하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 주린 자, 나병환자나 귀먹은 자들을 죽은 자들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가난한 자란 단순히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족하고 결핍되어 없음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을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는 것이 구원의 은혜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낮은 자리,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선포한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낮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겸손하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살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치신 이 이적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말씀에 비추어 높은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 마디로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고방식이나 정신이다. 십자가 없이 살 수 있다는 자는 율법주의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수종병자와 같은 존재이다(202211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31.눅1401-06 끌어내지 않겠느냐_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치심(2022011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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