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적 17_맹인 바디매오를 고치심
마가복음 10:46-52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은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복음 20:29-34, 누가복음 18:35-43에 동일하게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서 질병을 고쳐주시는 마지막 이적으로 기록하였다. 공관복음서의 본문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 46절에서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라고 말씀한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당도하였을 때 첫 번째 성이 여리고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서고 백성들은 뒤따라 성을 하루 한 번씩 엿새를 돌다가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큰소리를 외쳤을 때 그 성은 무너졌다. 그때 여호수아는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여리고는 저주받은 성읍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 16:34)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에 과거 여리고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운 성읍으로 건축되어 헤롯 왕의 휴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 여리고 성이 있고 신 여리고 성이 있는데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떠날 때라고 하였지만 누가의 기록에서 여리고 성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신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셨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저주의 성읍인 여리고에 가셨다는 것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마가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밝히지만 마태는 “맹인 두 사람”으로 누가는 “한 맹인”이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차이는 기록의 모순이라 볼 수 없다. 마태는 9:27-31에서 두 맹인이 눈을 뜨는 이적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처럼 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두 명의 증언이라는 의미로 메시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마태는 두 사람을 언급함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마 9:27, 20:30,32), “하나님의 아들”(마 8:28-29)로 증거한 것이 두 증인에 의한 분명한 증거로 나타낸 반면 누가는 두 사람 중에 한 맹인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디매오”란 거지 맹인의 이름이 아니라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맹인으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관계로 그 부모가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이름도 없는 거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9:2에 보면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제자들이 묻는다. 이런 표현으로 보았을 때 맹인이 된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즉 저주로 여기는 것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맹인도 자신이 저주 받은 자로 여겼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8절)라고 두 번을 외친 것도 단순히 무리들이 꾸짖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거듭 외치게 만든 일로 인하여 공관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님에 대한 두 번 확실한 증언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증언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족보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그리고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란 단순히 양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삼하 5:2). 따라서 유대인들은 언약에 근거하여 다윗의 왕권이 다시 회복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진 메시아상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이미 1:1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선언하면서(마 1:1) 곳곳에 그 증언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맹인의 유일한 고백을 통해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요 왕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런 점에서 맹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48절)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표현이다(참고 마 9:36).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단순히 병 고치는 힘을 가진 능력자로 본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 곧 왕으로 보고 고백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 그러자 맹인은 “선생님(랍비)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물음과 맹인의 답변이 이상하지 않는가? 서로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맹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는데 이렇게 물으신 것이 그렇고 또한 맹인이 원하는 바는 눈을 뜨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물으셨으며 또한 맹인이 답변한 그 의미는 무엇일까?
마태복음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을 세 번(마 16:21, 17:22-23, 20:18-19)이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등극하실 때 두 아들이 좌우편의 자리에 앉기를 요청한 문맥과 연결하여 맹인을 고치신 이적을 기록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고 묻자 네게 있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시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1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가복음의 본문도 재물이 많은 사람을 만나신 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막 8:3, 9:31, 10:33-34)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구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절)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정치적 메시아로 드러날 “주의 영광”(37절)을 말하면서 왕이 되면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런 사고방식이었다면 유대인이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는 1도 관심이 없고 죄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세상의 힘이고 명예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죄성이다. 그 죄성으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원수로 다가가고자 한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탐욕을 채워주는 기도를 위해 교회당을 찾는다.
마태나 누가의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50절)이라고 마가는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이란 신분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맹인이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다 벗어던졌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 합류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라고 말씀하시자 맹인은 즉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른다. 마태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마 20:34)라고 하였다. 단순히 맹인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에 의해 눈을 만지셔서 믿음이신 예수님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그 믿음이다. 그것을 마가와 누가는 “네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맹인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맹인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구원을 이루신다.
맹인이 원한 것은 그저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눈을 떠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맹인의 상태에서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자신들의 왕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은 실제 영적인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주어졌다는 증거로 눈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으나 오히려 보지 못하는 맹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고 고백하였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 모두 저주 아래 있어 앞을 보지 못하는 존재로 폭로하고 계셨던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오늘날도 십자가를 알고 본다는 것이 우리의 죄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맹인을 고치신 표적을 나타내신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은 너희들을 위해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는 은혜이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맹인으로 만드시는 심판이다. 맹인에게 베푸신 은혜가 십자가라는 것을 알게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와 생명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자이다. 십자가를 보게 된 자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가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206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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