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4강 로마서 15:1-7 한마음과 한 입

불편한 진리 2022. 4. 24. 16:07

https://youtu.be/seJlcAAsKUE

 

❖ 로마서 일흔네 번째 강론

로마서 15:1-7

한마음과 한 입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자기 삶에다가 종교적인 힘을 더 추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식으로 세상에서 살다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여 교회에 나가는 것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조금 더 심취하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정도로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 욕심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거기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남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종교도 하나의 소유가 된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한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성도란 세상적인 것에 하나님에 관한 요소를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삶이다. 예수 믿게 하는 성령님의 일하심은 나 있음으로 출발해서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늘의 생명을 더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4:17)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 삶에 예수를 하나 더 추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 없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세계, 있음의 상태로 전환시켜 주신 새로운 창조이다(고후 5:17).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구원이 내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사실에 우리의 난처함과 당혹스러움이 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골 1:13).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기존에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원리, 세상의 법칙, 세상에 속한 나를 날마다 십자가 죽음에 넘겨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으로 사는 것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라고 하였다. 즉 나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강,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기쁨을 성령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한정된 것들로 서로 논쟁하며 판단하는 것은 자기 기준에 맞춘 편의 때문이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전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2절). 바로 앞의 구절 14:23에서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강하고 약한 문제를 언급하니까 “믿음이 강한”, “믿음이 약한”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뒤나토스’(할 수 있는), ‘아뒤나토스’(할 수 없는)라는 말이다.

“담당하고”(헬, ‘바스타조’)라는 말은 ‘부담하다, 떠맡다. 견디다’라는 뜻이다. 즉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는 주님의 몸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기에 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해 판단하고 논쟁할 필요가 없이 견디고 참으라는 의미이다. 남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낫다는 마음으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이루고”라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선 안으로 향하여, 선을 위하여’라는 말이다. 그리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라는 말씀 역시 14:19에서 본 바와 같이 ‘집을 세운다’라는 말이다. 즉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한몸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 주위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기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기쁘게 하심(희락을 주심)으로 선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님의 집으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3절 말씀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절)라고 시편 말씀을 인용한다.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7-9)

 

 

다윗이 비방 받는 억울함에 대해 토로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후손이 당할 비방을 예언한 시이다. 이 말씀을 통해 바울 사도는 예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방 받아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방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누구도 환영하거나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이 다윗 언약 안에서 말씀의 성취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선포하였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1-6)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지은 잘못의 대가로 오신 것도 아니었고,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었다. 실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고 말씀한 것같이 십자가를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라고 밝힌다.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침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인내”(헬, 휘포모네)란 ‘하나님 아래 머물러 있게 하신다’라는 뜻이고, “위로”(헬, 파라클레시스)란 ‘가까이 부름, 초청, 권면, 위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내와 위로에 우리를 머물러 있게 하시는 목적은 “소망”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지금도 유튜브에 보면 요셉이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엉터리 해석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실 일을 꿈으로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시편 105편에 이렇게 나온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6-19)

 

 

요셉의 꿈이 총리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시기까지 그를 묶어 놓았을 뿐이다. 요셉의 인내심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를 고난 가운데 붙잡아 놓으시니 요셉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인내란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열심을 인내라고 하고 그것을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이루어 내시기 때문에 위로라고 한다.

그래서 5절에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이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절)라고 선포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는 말은 우리 성경에 번역된 문자 그대로 본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혹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같은 뜻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죄인이 예수님을 본받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같은 뜻일 수 없다. 역사 이래로 인간들이 같은 뜻을 가지고 행한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 열심당 등의 모든 공동체들이 서로 교리가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드러난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다. 인간이 서로 한마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할 때 외에는 없다.

이런 점에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절)라는 선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라는 말씀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영화롭게 하다, 찬양하다’라는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만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인해 영화롭게 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 되는 것밖에 없다. 그것을 “한마음과 한 입”이라고 표현한 것인데 이는 같은 생각으로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하나의 진리를 말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서 이미 다 완성된 것으로 나타내셨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4-5, 21-22)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죄인들, 즉 자기 백성들을 영접하셨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가 서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도 우리가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서로 영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었다면 한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다 영접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영접한다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자기 몸으로 부르신다는 뜻이다.

부르실 때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나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여서 부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부르셔야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 부르심을 입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는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으며 소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폭로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이대시는 은혜를 확인하는 것이다(202204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4.1501-07 한마음과 한 입(202204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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