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예순두 번째 강론
로마서 12:1-2
말씀의 섬김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 말씀은 많은 교회들의 주보 예배순서에 항상 고정되어 있다. 예배에 대한 성경 말씀이 오늘날 우리가 일정한 장소와 지정된 날짜에 고정된 형식적인 예배를 지원해 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장소를 초월한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예배는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요한복음 16장에서 이렇게 밝혀준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모든 인간은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기에 성령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셔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하시는가? “들은 것”, “내 영광”, “내 것”을 가지고 하신다. 한 마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에 속한 것들을 받지 않으시고 오직 영과 진리, 즉 진리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받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는 분이라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 전체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고 예배 참석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하는 신앙 생활, 즉 구체적으로 기도와 봉사, 전도, 구제 등등을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종교 생활에 불과할 뿐이지 진정한 영적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영적 예배를 말씀하거나 요구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런 우리의 종교 생활을 도둑질이요 강도짓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탐욕을 이루는 도구로 만들고 영생을 도둑질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미신이 되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우상 숭배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영적 예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 성경에는 어법상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먼저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파라칼레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 우리 성경 대부분은 “권하노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등의 다양한 뜻이 있다. ‘파라’(~곁에, ~옆에)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곁에 부른다’라는 말인데 단순히 교훈을 주거나 권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된 자들로 초청하여 이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디에 초대한 상태로 말하는가? 그것을 밝혀주는 것이 그다음 구절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오이크티르모스’는 11:32에서 표현한 “긍휼”(헬, 엘레에오)과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로 ‘동정, 연민, 불쌍히 여김’이라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권하노니”를 수식하는 것으로 번역하였으나 문장 구조상 “드리라”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긍휼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드리라’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에서는 자비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모든 자비하심으로”라고 번역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무한하신 긍휼 안에 초대하여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짧은 문맥으로는 9-11장까지 전개한 내용의 결론이고 긴 문맥으로는 1-11장까지의 전개한 내용에 근거한 결론의 말씀이다. 즉 이제까지 말한 내용을 원인과 근거로 삼아서 결과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자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된 상태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아멘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음을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12장 이하를 기록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반면 인간은 죄인으로 영생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로, 이 땅에서 죄의 권세에 매인 존재라고 로마서 앞부분에서 속속들이 다 밝혔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에 초대되었다는 말씀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긍휼과 관계없는 자들에게는 의미심장할 이유가 없다.
이미 서술한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 긍휼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죄인들을 중심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 자비하심 안에서 생각하자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자기 백성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 긍휼 안에 초대된 상태에서 우리의 삶과 연관된 복음을 계속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긍휼에 초대된 자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몸”을 육체(헬, 살크스)가 아닌 ‘소마’로 쓰고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담을 수도 있고 생명을 담을 수 있는 몸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미 6장에서 이렇게 선언했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2-14)
문제는 여기서 “드리라”라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 보면 ‘파리스테미’로 쓰고 있는데 ‘두다, ~의 처분에 맡기다, 제공하다, 출석하다, 나타내다, (제사 용어로) 바치다. 가져 오다’ 등의 뜻이 있다. 제사 용어의 대표적인 표현이 누가복음 2:23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파리스테미’는 ‘파라’(~곁에, ~옆에)와 ‘히스테미’(고정하다. 굳게 세우다)의 합성어이다. 즉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 가까이 세운다, 하나님 곁에 굳게 세운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이 단어를 다른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 사도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우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바울의 힘으로도 우리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드리라”라는 표현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지는 것이 긍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몸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그의 몸 된 자들이 되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자비하심)을 통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고 산 제물이 되었다. 여기서 “산 제물”이란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10:3) 않는 자들이다.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랑을 입히시고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살아 있는 제물로 하나님 곁에 세우신 바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 11:36 말씀과 함께 다음의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였는데 “영적”이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로기코스’인데 ‘로고스’에서 온 말로 ‘말씀의, 말이 되는, 이성적인, 영적인, 합당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약 성경에서 딱 두 번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베드로전서 2:2에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신령한”으로 번역한 말이 ‘로기코스’이다.
문맥상 ‘순전하다’는 것과 ‘신령하다’는 것을 동의어로 본다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순전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돌로스’로 ‘기만이나 계략이 없는, 술수나 술책이 없는’을 뜻한다. 즉 계략이나 술책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거짓이 없는 진리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에 의한 순수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상태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로마서 본문으로 돌아와 이 말씀에서 단순히 “영적”이라는 말로만 이해한다면 본문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정신적인 것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곡해될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영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 즉 성령에 의해 하늘에 속했다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참고 롬 15:27, 고전 2:13-14, 14:12, 계 11:8). 따라서 본문에서는 단어의 유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말씀의, 말씀에 의한’이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다고 생각된다.
“예배”라는 말은 ‘라트레이아’(‘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라트류오’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보통은 ‘섬김’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신약에서 “예배”라는 말로 주로 사용되는 단어는 요한복음 4:24에서 보듯이 ‘프로스퀴네오’(~을 향하여 입 맞추다)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왜 ‘프로스퀴네오’를 쓰지 않고 ‘라트레이아’라는 용어를 썼을까? 그것은 앞에서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표현을 하였기 때문이다. ‘라트레이아’는 히브리어 ‘아바드’(섬기다, 봉사하다)의 역어로 70인역에서 제사와 관련되어 섬기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참고 민 3:7-8, 4:23, 4:30,47, 수 22:27). 이렇게 본다면 예배라는 의미보다 ‘섬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고 롬 9:4, 히 9:1,6). 즉 ‘말씀의 섬김’이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자면 ‘초대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에 의한) 섬김(에 초대된 것)이니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단순히 시간과 장소에 매인 형식적인 예배를 정성스럽게 잘 드리자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를 통해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한 몸 된 교회로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진 살아 있는 제물,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초대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라는 의미이다. 말씀의 섬김 안에 있게 된 자들이 성도이다(202201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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