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적_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
마가복음 5:1-20
주께서 행하신 큰 일
마가복음 4:35 이하에 기록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표적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가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분은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4:1 이하에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바다에서 나타내셨다. 특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을 온전히 제압하실 십자가를 보여주신 표적이었다. 그래서 이미 구약의 시편 기록자도 “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2-13)라고 하였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은 바다 건너편으로 가셔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적을 나타내시는데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8:28-34, 누가복음 8:26-39에도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어진 사건이니까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 복음서가 다 동일하게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 두 이적은 연결된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4:40에서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물음과 41절에서 사람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하는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1-2a절)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에서도 “거라사인의 땅”(눅 8:26)이라고 하였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가다라 지방”(마 8:28)이라고 하였다. 가다라 지방과 거라사인의 지방은 같은 ‘데가볼리’(20절, 열 개의 도시) 지역 안에 포함된 곳으로 다른 지명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방인의 땅이라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했을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라고 하셨다. 이런 점에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 2:10)라고 한 말씀이 생각나게 한다. 요나 선지자가 바다에서 죽음을 경험한 후 이방인의 땅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한 것과 같이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표적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신 후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귀신 들린 자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2b-5절). 마태복음 8:28에서는 “귀신 들린 자 둘”이라고 하였는데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복음서 본문의 모순이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이 두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앞에 나와 말한 사람은 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가와 누가는 그 한 사람에게만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직역을 하면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사람’이다. 헬라어의 ‘아카달토스 프뉴마’를 우리 성경에 ‘더러운 귀신’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이해하듯이 억울하게 죽어 떠돌아다니는 넋이나 혼령이 아니라 ‘성령’(하기오스 프뉴마/거룩한 영)과 대조된 의미에서 더러운, 정결하지 못한 영적 존재이다. 인간은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자와 거룩한 영 안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더러운 말씀(비진리) 안에 있는 자와 거룩한 말씀(진리) 안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귀신 들린 자의 거처를 “무덤 사이”라고 세 복음서가 공통으로 밝히고 있는데 2절의 “무덤 사이에서 나와”라는 말은 ‘무덤들로부터’ 나왔다는 말이고 3절의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라는 말은 ‘무덤들 안에’ 산다는 말이다. 그 당시 무덤은 동굴 형식이었기 때문인데 무덤을 거처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죽은 자들과 함께 있어 실상은 죽은 자이며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고 앞의 이적에서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말하자면 믿음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귀신 들린 상태를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부정하고 죽은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죄인의 비참한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라는 것이다. 죄인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해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죽은 존재이다. 이러한 죄인의 상태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라고 한 것과 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거나 죄를 짓지 못 하게 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악한 영의 힘에 의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고 선하며 좋은 사람, 모범적이며 인격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땅의 모든 사람은 귀신 들린 자이고 죄인에 불과하다. 죄인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꿈과 희망을 가지며 원대한 목표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몸을 해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고자 하면 할수록 결국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될 뿐이다. 그것이 마귀의 권세에 매여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죽은 존재로 보신다.
그래서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은 십자가로 사탄을 결박하여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일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들은 십자가에 근거하여 사탄을 제압하여 승리하신 사건의 전리품이다.
죽은 존재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주하였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6-7절).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고백을 하였지만,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절하며”(헬, 프로스퀴네오)라는 표현은 ‘예배하다’, ‘경배하다’라는 말인데 예수님께 예배하지만, 그 예배는 예수님과 관계없는 예배이다. 이런 점에서 죄인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단순히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와 당신은 서로 따로 있다’라는 말이다. 서로 따로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대적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대적자의 관계에 있는 존재가 바로 마귀이고 사탄이다(마 13:39).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셨으니(요 8:44) 모든 인간은 마귀와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대적자, 원수가 바로 나 자신이다(롬 5:10, 8:7, 약 4:4).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면서 귀신 들린 자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8-13절).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시고 이름을 물으니 “군대”라고 하였다.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로마군대의 약 6,000명 규모를 일컫는 말인데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다’라는 것이다. 귀신의 수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다는 것으로 세상적 ‘힘’을 나타내고 있다. 창세기 2:1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라고 하였을 때 “만물”(히, 차바)이 ‘군대’, ‘무리’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하나님의 군대’이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히, 체바오트 아도나이)라고 표현하고 있고(삼상 1:3, 시 24:10) 그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내 군대”(출 7: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를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세상적 힘의 군대는 철저히 멸하고 자기 군대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27-31)
본문 19b-20절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 때에 애굽 군대를 바다에 던져넣어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께서 행하신 “큰 일”이다. 이 큰 일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성취하신 십자가이다. 결국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언약을 성취하시는 승리를 미리 보여주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10절에서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하였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눅 8:31)라고 하였다. “무저갱”이란 ‘밑이 없는 구덩이’라는 뜻인데 사탄을 결박하고 가둬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계 20:1-3). 용의 권세를 받은 짐승이 거처로 삼고 있는 곳이 바다와 땅이다(계 13:1,11). 그런데 예수님의 허락으로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다는 것은 더러운 영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하시고 또한 그의 거처가 어딘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사탄을 결박하여 옮기실 수 있는 말씀의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14-19a절).
사람들이 보았던 것은 귀신 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하게 된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침을 받은 자가 무서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주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자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졌는데 직역을 하면 ‘건전한 마음을 가졌다’라는 뜻으로 구원을 받은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죄인이 스스로 건전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꿔주셔야 하는데 그 마음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귀신 들린 상태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다. 이것만 주께서 행하신 큰 일이다(강론_김영대/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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