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적_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이적
마가복음 4:35-41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이 이적은 마가복음 이 본문 외에 마태복음 8:23-27, 누가복음 8:22-25에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고 예수님은 주무셨는데 바다에 광풍이 일어 제자들에게 위기가 왔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 대한 많은 설교들의 핵심은 우리 인생의 풍랑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교훈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이 이적을 세 복음서에나 기록하여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잔잔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정도의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이적들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늘 말씀드렸다. 표적은 우리의 죄성을 고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몇가지 있다.
예수님과 함께 배에 있었는데 풍랑이 일어난 것은 무슨 뜻인가? 뿐만 아니라 바다가 바람에 의해 배가 요동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주무시고 계시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풍랑이 없어야 하고 만약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주무실 일이 아니라 제자들의 요구가 있기 전에 빨리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작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구원해 달라는 그 구원이 무슨 뜻이며 믿음이 작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때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본문을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35절)라고 기록한다. “그 날”은 언제일까? 마가복음의 문맥을 통해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비유를 가르치신 날이다. 비유를 말씀하신 이후 배를 타고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고자 하셨다(막 5: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다면 마가가 “그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뜻은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실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주신 이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실 때에 생긴 광풍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눅 8:23)라고 기록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상황에 ‘마침’ 광풍이 생겼다. 즉 주님께서 의도하신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신 말씀은 ‘반드시 저 과정을 통과하자’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광풍이 생겼는가? 아니 하나님께서 왜 광풍을 허락하셨는가?
본문 37절에 보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하였고 마태는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자들 중의 몇은 어부였고 바다에서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으로 광풍에 대처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도 스스로 해결하는 일에 하나님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불과하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것을 여기서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제자들이 광풍 가운데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 한계를 지닌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와 더불어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죄성을 폭로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배에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무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셨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 기록자는 예수님이 주무신다고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는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라고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물”이란 배의 뒤편이고 “베개”(헬, 프로스케팔라이온)라는 말은 머리를 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광풍이 일어 배에 물이 가득 차기까지 일부러 기다리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 어떤가를 드러내셨다. 마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라고 기록하고 누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절)라고 기록하였다. 마태복음의 본문을 가지고 어떤 분들은 제자들의 믿음이 작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던데 믿음은 크고 작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다. 따라서 믿음이 작다고 하신 것은 마가의 표현대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태가 기록한 “주여 구원하소서”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천국을 소망하면서 구원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풍랑으로 인한 어려움에서 구해 달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가는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하였고 마가는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말한 구원이란 죽음에서 구해 달라는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다.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라고 하였다. 마태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라고 하였고 누가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 8:24)라고 공통적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기록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바람과 바다를 인격적으로 보고 꾸짖으시는 말씀을 하셨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가 되게 하셨고 뭍이 드러난 것을 땅이라고 칭하셨다(창 1:6-10).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그들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말씀하셨다(창 1:27-28).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창 3:17). 여기서 땅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바다도 포함한 땅이다. 사람이 죄의 권세에 매이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땅과 바다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광풍이 있는 바다란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대적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광풍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 실질적인 세력자에 대하여 꾸짖고 책망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저주 아래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적인 악의 세력을 제압하신 권세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 바다와 땅을 거처로 삼고 있는 악의 실체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 13:1,11)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1절). 36절에 보면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라고 하였다. 다른 배들에 있던 자들도 함께 이런 고백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였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는 자연, 즉 바람이나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에 단순히 놀란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9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시 89:8-9)
요나서 1:4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않고 다시스로 도망할 때에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하였고, 시편 107:25에 보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라고 하였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사 51:15)라고 선지서에서도 말씀한다. 즉 바다의 폭풍은 하나님께서 바람을 내리시는 것이고 그 바다의 경계도 정하신 분이기에(욥 38:8-11) 그분이 죄의 권세로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사탄이 광풍을 일으키도록 잠시 허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생겨 배를 덮은 것과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신 것은 분명히 의도적이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시며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를 폭로하신 후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 이적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믿음이 없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누구이신가를 알라는 것이다. 즉 믿음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들과 함께 배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이었다.
결국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친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이다. 실로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이 이적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하고 죄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이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표적이다.
세 복음서 기록자들이 동일하게 이 이적과 연결하여 바다 건너편 거라사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같은 문맥에 놓고 있다는 것은 사탄의 권세를 이미 제압하신 것에 대한 결과로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막 5:1-10, 마 8:28-34, 눅 8:26-39). 그 온전한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2-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가 된 자는 광풍이 있는 이 땅의 바다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유리 바다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노래할 뿐이다(계 15:2-4)(강론_김영대/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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