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11.마가복음 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불편한 진리 2021. 10. 24. 13:07

https://youtu.be/kwFwv8zi0sw

 

예수님의 이적 11_혈루병 여자를 고치심

마가복음 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두 이적이 연결된 본문이다. 12년을 혈루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여자를 고치신 이적과 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적이다. 공관복음서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두 이적을 연결하여 기록하였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는 도중에 혈루증 여자를 고치신 이적이 등장한다. 본문의 정황을 보아서 어쩌면 이 일로 지체하지 않았다면 야이로의 딸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루병 여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나타내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셨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나 죽은 후의 일이 예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이적에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며 오히려 죽은 후 살리시는 일로 나타내고자 하신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혈루병 여자를 고치신 일이 갑자기 중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단순하게 연결된 사건이니 그렇게 기록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 두 이적을 연결하여 행하심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 안에서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이적을 한꺼번에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편의상 우리는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두 이적은 마태복음 9:18-26,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의 본문은 많이 압축되어 있고 마가복음의 본문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가버나움 쪽으로 오셔서 바닷가에 계실 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22)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간곡히 구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그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노중에 있었던 그 현장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4).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25)라고 소개한다. 이 여자에 대하여 본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6)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7-28). 이 여자가 원한 구원은 어떤 것이었을까?

본문에 대한 많은 설교들을 보면 여자가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믿음의 행위가 있었기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4)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자고 적용한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은 여자의 믿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는 것과 상충 될 수밖에 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내 믿음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이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은 혈루병 여자를 고치신 것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적이 철저히 예수께서 의도하시고 만드신 상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혈루병 여자가 예수님께 접촉하게 만드시고 다음에 그 여자를 예수님께서 만나셨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려주는 구절이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30)라는 말씀이다(누가복음 8:46에서도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에 능력이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능력을 내보셨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무리가 에워싸 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촉하고 있었지만(31, 8:45 참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능력이 나타나 병을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여자만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여자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있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것인가? 이는 후자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푸셨기 때문에 여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즉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행위의 주체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믿음이란 여자가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이다. 이를 다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네게 주어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뜻이다. 여자의 믿음은 자기가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푸셨기에 주어질 수 있었다. 성경에서 능력’(, 뒤나미스)이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곧 십자가이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24)

 

그러므로 예수께서 능력을 내보내는 이적을 통해 혈루병 여자를 치료하신 것은 죄의 증상인 질병이 처리됨으로 곧 지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가 처리되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자신의 십자가를 나타내고 보여주시는 표적이다.

그러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에 이런 이적을 나타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야이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말한 것을 보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라고 하였다. 야이로나 혈루병 여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지만(27, 1:28, 2:1 참고) 아마도 많은 이적을 행하여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선지자 정도로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서 능력있는 예수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점에서 혈루병 여자도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28)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는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었다. 이것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의 생각이었고(6:56) 또한 우리들의 생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능력있는 목사의 안수를 받거나 기도하여 병을 고쳐보자는 수준의 종교성이다.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27)라고 하였는데 마태복음 9:20에 보면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누가복음 8:44에서도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옷 가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스페돈인데 히브리어 치치트’(옷술, , 옷자락)의 번역이다. 마태복음 23:5에서는 옷술이라고 번역하였다. 유대인의 옷단 술이란 8개의 실을 5개의 매듭으로 만들어 겉옷의 네 모서리에 붙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15:38-39, 22:12 참고).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말한 것은 이런 옷차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4:9).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혈루병 여자를 굳이 만나신 이유는 말씀을 상징하는 옷술을 만지는 주술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으로 하나되는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옷에 접촉하는 것으로 병을 고침 받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무리 중에 찾아내어 그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셨다.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란 신을 찾고 그 신과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찾아오셔서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하나 됨이다. 율법에 의하면 유출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25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26 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2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15:25-27)

 

레위기 15장에 보면 유출병이란 피든지 고름이든지 무엇이든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통칭하고 그것을 부정한 상태라고 하였다. 유출병이 있는 상태에서 접촉은 다 부정한 것이 된다. 접촉되었다면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정결하게 하여야 했다. 이러한 율법을 통해 죄 가운데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다 부정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거부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규례들을 잘 지키면 자신은 정결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율법을 열심히 지켜 영생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과 혈루병자를 동원하셔서 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떤지를 폭로하셨다. 그것이 바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재산이 다 털린 여자이고 열두 살 외동딸의 죽음이다(8:42). 성경에서 열둘이란 언약의 숫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12년을 살다 죽은 아이와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은 여인을 등장시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며 저주 아래에서 자기 율법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하신다.

실로 혈루병 여자는 12년 동안이나 많은 의사에게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지만 병은 더 심해진 상태였다. 혈루병으로 부정한 여자와 같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죄의 권세에 붙잡힌 상태의 인간은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죽은 존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루병 여자와의 접촉을 통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만드는 분이시다. 혈루병 여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정한 인간의 피흘림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십자가에서 흘리는 아들의 피만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우리가 손을 얹어 살아나기를 구하는 것,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져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주술적인 것이거나 미신적인 것이다. 이런 종교적 행위나 율법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죄인의 종교성에 의한 것이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질병같은 고통에서 벗어나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어져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주어진 믿음에 의해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평안히 가라”(34)라는 말씀은 평안의 상태로 가라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에 의한 믿음만이 하나님과 평화, 화목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질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부정과 비거룩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과 정결로 찾아와 입히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202110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11.막0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02110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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