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제7강 누가복음 7:11-17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불편한 진리 2020. 6. 28. 23:22

예수님의 이적_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

 

누가복음 7:11-17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거나 돌발적으로 발생된 일인데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고 이 땅의 역사 속에 드러난 일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언약하신 일들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늘의 묵시에 관한 일들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들은 그러한 하늘의 일들을 알 리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내 주셨는데 인간들은 그것조차도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해할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과의 대척점에 세워놓고 대결 구도로 성경을 이용하고 자기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단번에 알아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아는 자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로 갈라놓으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성경 자체가 밝히고 있다(13:11-17, 딤후 3:15-17, 벧후 1:20-21).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폭로하고 그 심판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에 예수님께서 적절히 대처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과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도구와 소품들을 배치하셔서 철저하게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11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 의도적으로 자신이 뜻하신 바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나인 성으로 가시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인이란 성읍에 가까이 당도하였을 때에 장례 행렬과 마주친다. 본문에서 죽음을 당한 집안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렇게 소개한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2). 죽은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청년(14)이었고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고 하였다. 이 청년의 죽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과부인 어미에게 어떤 존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성의 많은 사람이 함께 장례 행렬을 따랐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마을의 사람들도 젊은 아들의 죽음에 많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말씀이 정말 필요한 말씀일까?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당시 여자, 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거의 죽음에 처한 것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죽음의 한계에 자신의 죽음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 과부의 상황을 보면 울지 말라고 말했다고 해서 울음을 스스로 그칠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결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의미한 말씀이 아니라 울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14-15)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일어나라(, 에게이로)라는 말은 깨우다’, ‘살아나다’, ‘세우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 모두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라는 명령이 가능한가? 죽은 자에게 명령을 한다고 해서 그 명령이 수행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누가가 기록한 이 이적은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5:38)라는 말씀의 연장선 속에 있다. 6장에서 예수님은 소위 말하는 평지강론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친히 평지강론을 통해 말씀하신 것들을 성취하시겠다는 의도로 선포하셨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은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보이신 정도가 아니며 또한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울음을 그치게 하시는 자비의 마음을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에게 명령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셨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말씀을 아무리 듣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가지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하며,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죽은 상태라는 말이다(2:1). 율법을 제대로 행할 수 없는, 즉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죽은 자에게 주어진 잔인한 명령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고발하셨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죽은 자가 일어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나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평지강론을 비롯한 선포된 모든 말씀들은 이런 면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의 능력은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이란 이렇게 죽은 상태에서 그 말씀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살아난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생명이시고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즉 말씀의 능력은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으로 생명이다. 그렇다고 그 생명이 죽은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에게 주어지는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취하는 십자가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그 의도를 분명히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하였는지 모르지만 장례식에 참여했던 자들이 이렇게 고백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구약에서 활동한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가 온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왕상 17:17 이하)이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왕하 4:17 이하)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례식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통해 선지자로 오실 메시아를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아보셨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켑토마이라는 말인데 돌보다’, ‘택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이다. 룻기 1:6에서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는 말씀에서 돌보시사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룻기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것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님의 이 이적은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이 땅에 방문하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죽어 있는 죄인의 상태를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능력의 말씀으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기 백성이란 창세 전 언약 속에 있던 자기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불러들이신 자기 백성이다. 결국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죽음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과부의 아들과 같이 또한 그 아들을 잃은 과부와 같이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2:21-24)

 

출애굽 때에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이실 때에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발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장자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신 것이었고 유월절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나그네와 과부, 고아로 만드신 것이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그네와 과부, 고아와 같은 존재로 언약의 성취자를 보내실 것이고 이 땅의 나그네와 과부 고아와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메시아에게 합류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의 죽음 속에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담아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누가는 앞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적(7:1-10)이나 여기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을 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방인이나 과부와 같은 이런 죽은 자기 백성들을 부르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신다는 것이었다. 율법이라는 옛 틀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십자가로 은혜를 입히셔야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렇게 율법 안에서 죽은 자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주님의 몸된 교회이며 성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모임을 쉬기도 하고 또 모임을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참석이 어려운 일들이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이고 모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아야 하고 그 죽은 자에게 십자가라는 대속의 죽음으로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이어야 한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모였다는 것은 말씀을 하나라도 더 배워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씀에 의해 날마다 발가벗겨져야 한다. 오늘 우리가 자발적으로 모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죽은 시체를 여기 끌어다 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하나 더 알아 갑옷으로 챙겨 입고 무장하는 것이 아닌 말씀에 의해 무장해제가 된 죽음 안에서 생명을 확인하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20200628 강론/김영대).

 

 

이적07.눅 0711-17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202006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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