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34강 로마서 6:15-23 죄의 종과 의의 종

불편한 진리 2020. 2. 16. 17:29

❖ 로마서 서른네 번째 강론


로마서 6:15-23

죄의 종과 의의 종


오늘날 교인들이 가진 가장 분명한 명제 중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얻으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하면서도 대부분은 ‘내 믿음’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믿음은 선물로 받지만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하늘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끝없이 자신의 공로를 집어 넣으려고 한다. 이렇게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있는 죄인에게 은혜의 복음을 아무리 설명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복음을 지식으로 붙잡아 버린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잘 하는 나,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자기 죽음이 자랑거리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십자가란 먼저 우리가 죄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땅적 존재라는 것의 고발이고 또한 하늘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루어 은혜로 베푸신다는 표징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첫 머리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기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그분을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 땅에 발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합하여 함께 죽고 살아나 생명의 상태에 있게 된 자를 교회, 성도라고 바울은 이미 밝혔었다(롬 1:1-7, 6:1-11). 그렇다면 이제 교회, 성도란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굳게 세워진 자들이다. 그래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새번역성경에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재밌게 번역하였다. 6장을 시작하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2a)라고 하였는데 이 물음을 좀더 구체적으로 진전시켜 묻고 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였고 이제 은혜 아래 있는 상태인데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다시 묻는다. 


여기서도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6:2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표현과 똑같은 말인데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으며 못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더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즉 죄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법이 고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절)라는 말씀으로 죄 안에서 죽었다는 말 대신 종의 상태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종이란 표현은 주인의 노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과 같은 운명이 된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종으로 “내주어”라는 말은 13절에서 “드리며”라는 말과 같은 헬라어 단어 ‘파리스테미’, 즉 ‘굳게 세운다’는 뜻인데 죄의 권세에 종으로 자신을 내어준다면 죄의 종으로 굳게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망이고 순종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의에 이르게 된다고 선언한다. 종에 대한 규례를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신 15:15-17)


하나님께서 종에 대한 규례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자를 속량하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종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주인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영구히 종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여기서 바울이 죄의 종, 순종의 종으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종으로 해방되었을지라도 주인을 사랑하여 떠나지 않는 자의 귀가 뚫린 종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순종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곧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죄에서 해방되어 죄로부터 풀어짐을 받아 마음대로 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사망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사랑하는 주인에게 완전히 속한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생명)이라는 의미이다(22-23절).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2-34)


죄를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라는 권세에 매여 있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죄의 종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오직 진리에 의해서만 되는데 오직 예수님께서 진리로 오셨고 그 진리를 알게 된 것이 자유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란 단순히 죄의 권세에서 풀린 것만 아니라 진리이신 새로운 주인에게 속한 상태를 말씀한다.

 

그러면 여기서 “순종”이란 무엇인가? 헬라어로 ‘휘파코에’라는 말인데 이는 ‘듣다’, ‘청취하다’(휘파쿠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순종”이란 잘 듣는 것이 함의된 말이다. 즉 우리의 행위로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순종이라는 뜻이다. 온전한 순종은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그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순종은 믿음의 동의어이다.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8-19)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5)



순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믿음을 우리가 선물을 받았기에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순종의 종”(16절)을 “의의 종”(18,19절)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22절)다고 선언하고 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 이제 성도는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굳게 세움을 입은 자이다. 우리가 힘써 의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거룩함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따라서 구원, 영생이란 내가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뀐 상태이고 그 주인의 영역 안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0-23절). 여기서 “삯”(헬, 옵소니온)이란 군인의 봉급을 일컫는 용어인데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죄의 권세에 종으로 살다가 마침내 그 급여를 사망으로 받게 된다고 밝힌다그러나 의의 종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a)라고 기도하실 동안 십자가 밑에서는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고 있었다(눅 23:34b).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의 기도대로 십자가 위에서는 한 강도에게 낙원에 있게 되는 은혜가 입혀지고 있었다(눅 23:39-43). 죄인들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덮혀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육체를 덮는 옷을 나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나의 주인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을 이루어 내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은혜로 만나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하나님이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십자가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어떠하신 분으로 안다는 것과 내가 어떤 하나님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으로 좋아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밥 퍼주고 장학금 주시는 하나님, 내가 산 주식은 항상 저점이고 팔면 고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투기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부동산을 사기만 하면 몇 배로 뻥튀기시켜 주시는 하나님, 마스크 만들어 파는 사업을 막 시작했는데 갑자기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돌아 대박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가?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은 없으며 내 기쁨, 내 만족이 우선되는 하나님은 가짜라고 선언하였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http://cafe.daum.net/joosung 20200216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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